2012년 동생은 우울증 약을 넉넉하게 처방받아 잔뜩 챙겨 트렁크에 쑤셔 넣고 런던으로 떠났다. 공황장애를 털어 내고, 영어 학원 선생님으로 일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혼자만의 꿍꿍이가 있었던 거였다.
르 꼬르동 블루, 어째 이름도 블루일까? 런던으로 향하는 동생이 아슬아슬해 보여, 응원은 한마디도 해주지 못했다. 르 꼬르동 블루, 세계 1위의 요리학교에서 파티시에 과정을 해내고, 영국 최고의 호텔 주방에서 10시간씩 과일을 깎고, 밑 작업을 하던 인턴쉽 기간을 지나갔다. 그 기간 동안 그녀는 한 번도 약을 먹지 않았다고 했다.
독일에서 고군분투하는 동안, 동생도 한국에서 잘 지내는 줄만 알았다. 관심 없었다. '내가 제일 힘들어.' 또는 ' 나만 힘들어.'라는 생각으로 친정엄마에게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전화하는 것이 다 였다. 동생과는 연락이 없었다. 약국을 하시는 엄마, 아빠는 비행기 타거나, 다른 나라를 여행을 하는 일 모두 어려워하시는 탓에 '언니 잘 지내는지 가봐라'며 친정 엄마는 본인 대신 동생을 세 번이나 독일로 보냈다.
유럽 여행의 최적기는 짧디 짧은 가을이다. 동생은 영어 과외를 하고 있었기에 비행기 값도 싸고, 여행 비수기인 가을에 독일을 찾아왔다. 긴 여름 방학이 끝나고, 학기가 한창이라 동생을 데리고 어디 멀리 가진 못하고, 얘들이 학교 가는 오전 시간에 시내 구경하고, 주말엔 당일치기 여행을 다녀왔다.
아이들을 데리러 학교에 동생이 함께 가주니 정문까지 가는 5분이 따끈하다. 다른 한국 엄마들처럼 무리 지어서 함께 얘들을 데리러 가고, 같이 놀다가 저녁이 되면 각자의 집으로 가는 과정이 남의 이야기 같았다. 남들은 아무렇지도 해내는 단짝 친구라는 관계는 내게만 정답 없는 시험보다 어렵다. Elementary 초등학교 라운지로 3시 10분 전이 되면 픽업하기 위해 엄마들이 삼삼오오 모이는데, 함께 점심을 먹고 같이 얘들을 데리고 온 듯한 한국 엄마들이 보이면 눈앞이 흐려졌다.
" 넌 왜 친구 없어?"
무리 지어 있는 엄마들을 보자 동생이 말했다.
" 언니, 너는 왜 혼자야?"
라운지에 서 있던 대만 엄마 Mandy에게 동생을 소개해줬다. Mandy의 얼굴엔 겸연쩍어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베트남계 미국인인 Trang에게 인사를 건넸다. 친정 식구가 한 번도 독일에 온 적이 없는 Trang의 얼굴엔 부러움이 떠오른다. 외로운 호박씨 옆엔 외로움을 타는 사람들만 있었다.
미술관에 가고 싶었다. 천천히 걷고, 같은 그림을 보면서 평소에 안 하던 이야기를 꺼내는 그런 날을 갖고 싶었다. 아이들은 그렇기엔 어렸고, 남편은 그렇기엔 바빴다. 주변 누군가에게 미술관 가자고 말 꺼내기가 쉽지 않았다. 동생이 온 김에, 동생 가고 싶은 곳이 아니라 벼르고 있던 미술관을 가자고 했다.
" 나 슈테델 Staedel Museum 가고 싶은데, 같이 갈 사람이 없어."
같이 갈 사람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알 수 없다. 가자고 말 꺼낼 이는 찾지 못한 것은 사실이었다.
파티시에가 되겠다고 파란 꿈을 갖고 런던의 시간을 보냈던 동생 또한 사람이 어렵고, 관계가 힘들어 파티시에를 접고 있었다. 런던 가기 전처럼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그녀의 꺾인 날개에 대해서 한 번도 묻지 않았다. 파티시에로 한창 일하고 있었다면, 독일에 3번이나 올 수 없었을 것이다. 동생이 요샌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알지 못했다. 허겁지겁 미술관에 가자고 했다는 사실을 오늘에서야 안다. 7년이란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깨달았다.
미술관에 가던 날은 흐리고 비도 한 두 방울 떨어질 듯한 찌푸린 날씨였다. 하늘색과 똑같은 칙칙한 회색의 슈테델 미술관은 U-bahn 지하철을 타고 갔다. 서울로 치면 종로나 광화문쯤 위치한 슈테델에 차를 몰고 갔다가는 주차에 진땀을 뺄 것이 뻔했다. 아웃렛 쇼핑에서 산 버버리 목도리를 꺼내 두르니, 동생이 예쁘다고 했다. 동생에게 주고 싶지만, 사준 남편 눈치가 보였다. 준다고 뭐라 할 것도 아니지만, 그 목도리 사주고는 뿌듯해했던 그의 얼굴을 떠올리니 안 되겠다 싶었다.
루벤스 특별전이 끝나기 며칠 전이였다. 얘들 없이 미술관을 갔으니 원 없이 볼 수 있었다. 낮 시간 슈테델은 사람도 많지 않았다. 그림의 코 앞까지 다가가도 운영 요원이 한마디 붙이질 않았다.
아이들에게 내게 가장 귀한 것을 내어 주듯, 쓴 보약을 먹이듯이 조심히 미술관과 박물관을 데리고 갔었다. 만족은 하는지, 뭘 보고 있긴 한 건지, 전시 예절은 지키는지 곤두선 상태에서 그림을 만났다. 얘들과 밥을 먹으면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귀로 들어가는지 얘들 먹는 것만 신경 쓰니라 식욕이 달아나듯, 그림 보는 맛, 그 천상의 맛을 느끼는 감각을 상실한 지 오래였다.
어떤 그림을 보았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날 그림을 보러 간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소통할 이를 찾지 못해 혼자였던 시간을 보상받고 싶어 나선 길이였다. 엄마와 주재원 와이프가 빼고 난 나머지의 호박씨는 무엇을 좋아하는지, 나는 어떤 사람인지를 잊은 채 바라보는 그림은 각막을 스쳐 지나갈 뿐이다. 시신경까지 다다러 본 들, 감각한 신경이 남아있지 않으니 기억 속 어디에도 그날 본 그림은 없다.
앞에 서 있는 이가 삶의 어디쯤인지, 무엇을 생각하는지, 요새 무엇이 가장 고민인지 알려고 한다면, 당신은 당신 자체로써 존재하는 셈이다. 잃어버린 나를 찾기 위해서 고군분투할 때에는 상대가 보이지 않는다. 동생에게 지난 1년 동안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하기에 정신없었다. 뭘 하고 지내냐고, 파티시에는 왜 그만뒀냐고 묻지 않았다.
동생은 그림을 보는 둥 마는 둥, 슈테델 미술관 기념품 샵에 딸린 카페에 앉았다. 시큼한 감자 샐러드를 집길래, 영국에서 먹어봤나 보다 싶었다. 한입 먹어보더니, 눈이 동그래졌다.
" 감자 샐러드가 어떻게 새콤할 수가 있어?"
생전 처음 먹어보는 시큼한 감자요리에 놀라 한다.
독일은 뭐든 시계 먹는다. 흐린 날씨에 제정신으로 살라면 시큼한 신경 충격이 필요하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날씨에 달아질 기색이 없는 베리들은 베어 물면 이마가 찌릿해진다. 각종 베리로 만든 디저트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면서, 런던에서 파티시에로 2년을 있었던 네가 왜 독일 디저트는 나보다도 모르냐 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구두쇠 화교가 소유한 런던 중심가의 쥐 나오는 아파트에 살면서 적은 생활비를 맞추겠다고 외식 한번 못했던 그녀의 런던 생활기를 알 수 없다. 주재원 아내로 유럽을 살고 있으니, 그 생활은 알리가 없다. 동생이 일일이 나열해 줬다고 해도 경험해보지 않은 그 순간과 감정들을 헤아릴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외로움과 싸우고 있던 그 시간들에 대한 보상으로 동생에게 아웃렛 쇼핑을 자랑하고, 버버리 목도리를 꺼내 들었던 것으로 슈테델이 기억되고 있다.
" 언니, 나 가게 열면 언니는 와서 꽃 팔면 되겠다. 그림 에세이 강의도 공지로 붙여 두자! "
런던을 다녀온 지 10년 만에, 파티시에를 내려놓은 지 5년 만인 2022, 지금 공황장애와 싸우면서 동생은 파티쉐리 오픈을 준비하고 있다. 한 달 후면 그녀는 고아의 마음으로 세상에 혼자 서게 된다. 서울에서는 호텔이나 가야 맛볼 수 있는 Tea 푸드를 이뤄내겠다 했다. 영국의 Tea타임을 여기서 경험해 볼 수 있는 공간을 꿈꾸고 그 꿈의 첫걸음을 내딛고 있다.
처음 해보는 인테리어라, 넉넉지 않은 예산이라 손품 발품 팔며 진땀 흘리고 있는 그녀가 언니의 꽃 냉장고 자리를 어디로 하면 좋겠냐고 묻는다.
너의 꿈이고 너의 가게인데, 호박씨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하라고, 호박씨를 찾으라고 말한다.
벌떡 일어나 외치고 싶다. 꽃과 그림을 마주하고 있다면 숨 막힘과 호흡곤란으로 이름 지어진 이 병이 나을 것 같다고 소리 지르고 싶다. 그림을 보며 함께 글을 쓰고 이야기 나눌 타인이 한 명만 있어도 살아날 것 같다. 꽃다발 하나만 팔아도 먹기 싫은 신경정신과 약을 그만 복용해도 될 듯하다. 예술 에세이스트라는 글을 찍은 명함을 건네는 날이 오면 병원은 다신 안 가도 될 것이다.
그녀도, 호박씨도 치유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광야에 홀로 선 뒷모습이 세상 당당하다.
자신을 찾는 순간 더 이상 외롭지 않을 것임을 안다.
대문 그림: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 18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