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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가방 셔틀에 대한 독일인의 생각

by 호박씨

글을 쓰고 있는 노트북은 동생이 독일 온다기에 100만 원을 주고 사달라고 부탁해서 받은, 연식이 된 것이다. 코로나가 터지자 아들이 비대면 수업으로 사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들에게 새 컴퓨터를 사주었다. 딸의 비대면 수업을 담당했는데, 컴퓨터가 카메라 기능을 상실하기 시작했다. 결국 딸도 새 컴퓨터를 사주었다.


줌으로 사람들을 만날 일도 생길 때마다 한 번씩 딸의 새 노트북을 빌려 썼다. 나에게 다시 돌아온 이 노트북은 이렇게 글을 뽑아내고 있으니 새것으로 교체해버릴 생각이 추호도 없다.

딸이 본인 컴퓨터를 쓰지 말고 새 노트북을 사라고 잔소리를 하길래 회당 1000원씩 사용료를 지불했다.

딸의 비대면 수업이 없어진 데다, 줌 수업은 딸이 공부를 하는 저녁 시간이 대부분이니 효율적으로 물자들을 사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딸은 다른가보다.

" 이 컴퓨터는 내 꺼잖아."

자신의 물건에 손대는 것을 싫어하는 편인데, 물건 정리는 안 하는 편이다. 너의 것과 나의 것 그 선을 분명히 하고 싶어 하는 편이라, 정리하라는 말도 잔소리로 듣고 싫은 표정을 짓는다.


국제 학교 유치원은 만 3세부터 시작이다. 한국 나이로 5살인 딸아이는 본인이 메고 간 가방을 벗어 걸어야 한다. 외투를 벗어 가방 옆 옷걸이에 걸어 정리한다.

한국서 어린이집을 다니면서는 노란 어린이집 가방은 엄마 몫이었다. 원생 수첩을 읽고, 확인한 후 준비물을 챙겨 넣는다. 큰아이 어린이집 가방까지 두 개를 손에 걸고 어린이집 도착하면 선생님이 현관에서 받아 들었었다.


국제 학교 특성상 주차장에는 최고급 차가 즐비하다. 아침이면 포르셰 SUV가 동네 비둘기보다 흔하게 학교 앞에 도착해서 아이들을 내려주는데 아무리 비싼 차를 탄 아이들도 본인 가방은 스스로 매고 있다.

저렴한 차를 몰고 오는 경우는 Nanny, 돌보미인 경우가 많다. 내니들에겐 보급형 저가 차량을 제공해서 아이들의 통학을 맡긴다.

내니도 아이 가방은 안 들어준다. 책가방이 나의 소유 인지 너의 소유인지에 대한 팩트 체크는 불필요하다.


독일 초등학교 입학 시즌이 다가오면 매주 수요일 오는 전단지에서 학용품을 비롯한 각종 신학기 상품들이 할인 광고가 가득하다.

가방 가격에 대해서 잘못 본 줄 알았다. 가로 30cm 세로는 40cm이 넘는 거대한 가방이 200유로, 한화 30만 원이 훌쩍 넘었다. 독일 어린이들 덩치가 있다고 해도 사이즈가 불필요하게 크게 느껴졌었다. 국제학교는 특히나 교과서가 없기에 이 독일식 거인 가방을 사본들 자체 무게로 1킬로가 넘는 빈 공간을 지고 왔다 갔다 하는 셈이다. 가방에 들은 것은 오전 간식과 물병이 다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 독일 초등 가방을 산다. 아이가 자람에 따라 가방은 점점 아이 등에 맞게 되고, 아이는 점점 가방 무게에 익숙해진다. 200유로가 넘는 가방은 지구 멸망의 날까지도 헤지지 않을 내구성을 가진 독일제이다 보니, 1학년에 사서 독일 초등 마지막 학년인 5학년까지 바꿈 없이 매고 다닌다.

온전한 자신의 것, 완전한 내 몫이다.

사회의 축소판으로, 집에서 세상으로 내딛는 첫걸음에 시지프스의 바위처럼 돌덩이 같은 등 짐을 지운다. 가방은 들어주는 법이 없다. 나의 소유로 이름 지어진 이상, 부모는 넘겨주고 바라봐 줌으로써가 전부인 것이다.






호박씨가 사는 반포는 차로 10분 거리에 사립 초등학교와 외국인 학교가 있고, 영어유치원과 국제학교가 많다.

길마중 길을 산책하고 집에 돌아오는 4시면 국제학교 셔틀버스가 산책길 초입 신호등 앞에서 불법 주차를 한다. 불법 주차한 셔틀버스에서 국제학교 학생이 내린다. 같은 시간 산책을 하다 보니, 아이를 기다리는 아빠의 뒷모습도 익숙하다. 고학년 여자아이로 보이는데 아빠만큼 키가 크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아이가 아빠에게 책가방을 건네준다. 노 룩 패스는 저런 거구나.

책가방을 건네준 아이의 다른 손에는 핸드폰이 쥐어져 있다. 아빠가 가방을 건데 받으면 양손이 자유로운 아이는 마음 놓고 핸드폰을 본다. 아이의 가방을 받아 든 아빠는 핸드폰을 바라보는 아이에게 말을 건다.

저 아빠는 독일 국제학교 보모 보다도 못한 형편이다. 독일서 수없이 만난 보모 들은 보수라도 받는다. 아이를 픽업하기 위해서 차도 한대 내어준다.

가방을 받아 든 아빠가 아이와의 눈 마주침을 기다리며 아이를 바라보고 있다. 아이 아빠가 큰돈을 들여보낸 국제학교에서 아이가 배워오길 바라는 것을 무엇일까?



국제학교나 사립학교로 가지 않고 한국의 보통 교육, 공교육으로 아이들이 랜딩 중이다. 한국으로 돌아왔으니, 독일 가기 전과 같이 아이들을 대하고 바라보게 되는 현상이 생길까 봐 걱정이다. 어린 나이에, 앉아서 공부하라고 하니 안쓰러워 잘해주고 오냐오냐 해주는 호박씨가 될까 싶다.

아이의 공부는 내 머릿속에 남는 것이 아니라 아이의 것이다. 삶도 마찬가지다. 거들어 줄 수는 있지만, 엄연히 아이의 삶은 온전히 아이 소유다. 가방 한쪽 끈을 가끔 잡아주는 것은 가능하겠지만, 그 또한 이제 아이가 나보다 키가 더 커버렸기에 무게를 덜어줄 만큼 높이 들지도 못한다.

지금은 아이에게 무거워 보이는 가방이, 그리고 삶이 스스로 짊어지고 가다 적응하게 되는 날을 옆에서 기다려주고 바라보기만 할 것이다. 독일 국제학교에서의 시간을 고생 가득 실패가 아닌 깨달음 가득한 승화로 채우고 싶기 때문이다.

가방 들어주려다 내민 손을 거둬본다. 애들아, 네 가방은 네가 들어. 그리고 엄마 장바구니도 네들 먹을 거리니 네들이 나눠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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