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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서 주부 아르바이트해봤어요.

by 호박씨

인도네시아에 갔던 것이 대학교 3학년 반학기를 휴학하고 였다. 작은 아버지는 인도네시아에서 미국으로 저지(Jersy)를 납품하는 OEM 사업을 운영하고 계셨다. 경영학과인데 의상이 하고 싶었던 호박씨는 엄마를 몇 주을 졸라 인턴쉽 빌미로 가게 되었다.

작은 아버지는 현장보다는 대신 영문 계약서 번역을 시키셨지만, 생산현장업무가 더 끌렸다. 여공 중에서 똘똘해서 생산 반장 역할을 하던 M을 소개해주시고 하루를 현장에 있을 기회가 있었다. 마술처럼 여공들 손에서 만들어져 나오는 저지 드레스에 정신을 뺏겼다.

점심시간에 되면 공장 앞에 바구니 행상이 오는데, M이 사는 것을 따라 사서 같이 먹은 행동이 문제였다. 위생상태가 안 좋을 있으며, 먹고 탈이 나면 어쩔 뻔했냐며 작은 아버지, 사장님께 혼이 났다. 그런 음식 먹지 말 것이며, 또한 여공들과 밥을 함께 먹는 것은 절대 금지라고 못 박아 주셨다.

M이 좋았다. 일단 M이 나보고 예쁘다고 했다. 내 눈엔 M이 훨씬 예쁜데 말이다. 푸른 여공 유니폼을 입고도 사그라들지 않는 부드러운 갈색빛 피부가 탐스러웠다. 총명해 보이는 눈도 좋았다. 내게 인도네시아는 M 이였다. 사장 조카에게도 스스럼없이 같이 밥 먹자고 손을 건네는 용감하고 씩씩한 그녀가 나의 인도네시아였다.


독일에서 나의 두 번째 인도네시아를 만났다. B는 독일인과 결혼한 인도네시아인이다. 키가 크고 눈이 부리부리하며 입술이 두툼한 그녀는 천경자 작가의 미인도에서 막 걸어 나온 듯이 당당해 보였다. 북스토어 매니저인 그녀를 보자마자 기가 눌렸다. 호박씨야, 북스토어 자원봉사 잘할 수 있겠지? 자원봉사인데 긴장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생각하며 다독여보았다.




중고등학교가 위치한 본관 건물 1층 현관을 들어가자마자에는 북스토 어가 위치한다. 이름은 북스토어이지만, 책보다는 문방구류와 셔틀버스 티켓, 그리고 준비물을 구비한 곳이다. Frankfurt Warriors 국제학교 스포츠팀의 원정 경기 관련 교통편 신청과 경기복, 액세서리 등 학교에서 필요하다 싶은 아이템은 대부분 다루고 있는 곳이다.


북스토어 자원봉사의 장점은 학교 행사를 꽤 찰 수 있다는 점이다. 시험 기간에는 공학용 계산기를 사러 오고, 국제학교 간 리그가 펼쳐지면, 스포츠 용품을 사러 온다. 졸업이면 졸업앨범 신청도 받는다.

단점은 자원봉사이지만 돈을 다루는 일이라는 점이었다. 숫자와는 거리가 먼 데다가 돈을 무겁게 여기는 호박씨로써는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수명이 100년은 되보임 직한 POS로 판매가 이루어지고, 그 외의 작업은 B의 간단한 엑셀 장표와 수기를 통해 북스토어의 회계과 재고 관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B가 북스토어로 매니저로 일한 시간은 얼마나 될까? 곳곳이 B의 정성이 서려있다는 것을 북스토어에 가면 느낄 수 있다. 인도네시아 인으로 영어를 구사하고 유럽에 사는 그녀가 능력자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녀를 닮아 인물 좋고 기골이 장대한 아들 셋을 국제학교에서 키워내는 기간 동안 주부로써만 살 수 없는 억척스러운 아시아인이 B였다. B든 M이든, 독일이든 의류 공장이든 인도네시아인들은 매력 있다.

자녀가 학교 스포츠팀에 소속되어있는 경우, 부모가 자원봉사 시간을 채워야 한다. 자원봉사로는

원정경기 오는 학생들에게 경기 전날 홈스테이 1회를 제공, 홈경기시 BBQ 바에서 햄버거 굽기와 판매, 그리고 북스토어에서 일하기 등이 있다. 북스토어에서 일하는 것은 채워야 할 시간이지만 북스토어 매니저 일은 B가 자원해서 맡은 직책이다. 돈도 나오지 않는 일에 시간을 들이는 B를 보면서 어마어마한 부자인가 보다고 여겼다. 그녀 팔목의 두툼한 카르띠에 팔찌와 세컨드카로 학교에 몰고 오는 벤츠 스마트를 보면서 추측할 따름이었다.






사람들이 들고 나는 국제학교의 특성상 교육과정을 크게 바꾸는 일이 드물어 준비물 또한 추가되는 사항이 많은 편은 아니다. 다만, 변동 사항이 있을 때는 영어라는 하나의 매개로 다국적의 부모들과 소통해야 하므로 준비기간을 넉넉하게 잡아 통보하며, 준비 사항에 대한 극강의 디테일을 첨가하여 알려준다.

초등 각반에 아이들 개인이 사용할 수 있는 패드가 지급되어 개인 헤드셋을 준비하라는 연락이 왔다. 패드는 반들이 돌아가면서 쓰면 되는데, 헤드셋은 착용을 해야 하니 각자 준비하는 것이었다.

그간 IT 담당 매니저가 아이들 귀에 안전한 음량의 모델을 조사하였다며 필요 기능을 탑재한 5가지 모델들을 추천해준 리스트가 도착한 것은 6월이었다. 8월 개학으로부터 한 달 후부터 헤드셋을 착용할 예정인데 2달 전인 방학식날 통보를 해주었다. 리스트에는 100유로 상당의 헤드셋이 있었다.

얘들 귀에 꽂는 건데 15만 원짜리를 사라고 하다니, 부자학교가 클래스가 다르구나 싶었다. 두 아이에게 각각 학교 추천 모델을 사주면 30만 원을 지불하게 될 예정이다.



로제타 스톤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부자학교가 협찬 클래스도 다르다. 한국에서는 로제타 스톤 프로그램 1년 이용권이 20만 원 상당이다. Frankfurt International School 학생이면 누구나 무료로 이용할 수 있었다. 로제타스톤 CEO 자녀가 학교를 다녔는지도 모르겠다.

북스토어에서 판매하는 아이템은 50여 가지가 넘지만, 한 번도 나가지 않은 헤드셋이 가판대 왼쪽 구석에 놓여있었다. 사가는 이도 없고, 재고 변동이 없던 검은 헤드셋의 이름은 로제타 스톤용 헤드셋. 가격은 10유로, 학교가 요구하는 헤드셋의 모든 기능을 다 갖추고 있었다. 어린이가 어학 프로그램을 사용할 때 쓸 수 있고, 마이크가 되며 아이폰에 적용 가능한 단자로 마무리되어있기 때문이다.

유레카! 로제타 스톤 프로그램이 공짜라는 사실을 아는 것도 한국인 중에서는 내가 유일할 것 같았다. 아이들은 로제타 스톤으로 하루 10분씩 독일어를 하고 있었는데, 주변 한인 중에서는 독일어 과외를 시간당 30유로, 5만 원씩 주고 한인 학원을 다니는 경우가 많아 돈 버는 기분이었다. 게다가 매주 와서 일하는 이 북스토어 구석에 처박혀 있던 것을 보물 찾 처럼 의미 부여해낸 것이 바로 나, 호박씨라니, 좋다 좋아.


8월 개학날 아침, 북스토어 앞에는 평소와 다르게 부모들이 북스토어 오픈 만을 기다리며 길게 줄 서 있었다. 미리 알려줬지만, 국제학교 학부모들은 준비할 생각이 없다. 아마존에서 좀 더 싸게 구매할 수도 있지만, 국제 학교 대다수 부모들은 싼 가격에는 관심 없어 보였다. 학교는 새로운 아이템의 판매를 북스토어에 맡겼고, B는 판매 담당일이 아니었으나, 헤드셋 때문에 연일 북스토어로 출근했다. 2인 1조로 4시간 일하는 북스토어 순번에 B도 포함되어있었지만, 재고 관리과 팝업 스토어 등의 건으로 늘 B는 본인 순번이 아닌 때도 나타나긴 했었다.

헤드셋의 색상이 문제였다. 7종이나 되는 컬러를 선택지에 넣어둔 학교 때문에 인기 색은 재고가 없기 일쑤였다. 부모들의 오더를 적고 돈을 미리 받아둔 후, 해당 학생 교실에 배달되는 과정이 북스토어의 일로 배정되었다. 자원봉사로 하는 일인데 업무가 더해지니 피로가 밀려왔다. B는 한결같이 유쾌하고 호탕한 웃음으로 매대를 지켰다. 아는 교직원과 학부모가 많아 인사하기 바빴다.

등교시간 30분이 지나자 아이들은 교실로, 부모들은 일터로 가고 한산해졌다. 작은 아이와 같은 반인 자녀를 둔 교사가 쉬는 시간 짬을 내어 북스토어를 들렀다. 아는 얼굴이 오니 들뜬 마음에 로제타 스톤 헤드셋 이야기를 꺼냈다. 애들 쓰는 건데 이런 가격이면 비싼 거 같다는 이야기를 월급쟁이 교직원은 알아줄 것 같았다. 교사를 포함한 교직원들 자녀는 주재원과 마찬가지로 자비로 국제학교 학비 낼 형편은 못된다. 뻔히 교직원의 지갑 사정을 아니, 보물 찾기로 나만 알고 있는 신박한 아이템을 알려주고 추앙을 받고 싶었다.

옆에 있던 B가 다가와 말했다.

" 학교가 그걸 추천하는 것은 그럴 만한 기능적인 면이 있는 거 아니겠어요. 아이들 귀를 보호하는 기능에 대해서 조사하고 고른 아이템이에요."


매장 매니저님이 계시는데 알바 직원이 손님에게 이렇게 말해본다.

" 이 물건 진짜 비싸죠? 제가 집에서 온라인으로 가성비 저는 물건 샀는데 괜찮더라고요. 웹사이트 알려드릴게요. "

매니저라면 기가 막힐 노릇이겠다. B 앞에서 호박씨는 매장에 관한 애정은 손톱만큼도 없는 아르바이트생이었다.






B의 남편은 은퇴를 하고, B의 세 아들은 Frankfurt International School을 졸업하고 영국, 네덜란드로 취직하게 되었다. 밀라노에 일찍이 사둔 주택으로 가게 된 B가 매니저일을 내려놓게 되자, 북스토어는 불난 호떡집 모양이었다. 20명 가까운 북스토어 자원봉사자 중에서 누구도 매니저를 하겠다는 사람은 없었다. B가 내게도 물었지만, 나 또한 1년 후에는 한국으로 돌아갈 예정이었기에 정중히 거절했다.

B가 말했다.

" 여기서의 일이 너에게 경력이 되잖아. 잠시라도 맡아보면 너에게 도움이 될 거야."

자원봉사 따위가 무슨 경력이 된단 말인가?

B가 북스토어를 애정 하는 줄은 익히 알고 있었다. 자신의 매장 인양 무상으로 그녀의 노동을 제공함에 의아해 해왔지만, 경력이란 의미를 부여하자 저건 오버다 싶었다.




2022년 6월 23일 오늘,

호박씨는 동생과 7월 중순 오픈 예정인 디저트 카페용 POS를 조사 중이다. 뼈 문과에 장사라고는 난생처음인, 두 여자다. 심지어 한 명은 경력 단절이 10년 차이다. 이런 우리에게 숫자와 기술, 거기다가 돈이라는 무시무시한 세 가지의 숨통을 쥐고 있는 포스를 결정해야 하는 순간이다. 동생은 고전적인 형태의 단말기 업체를 들고 왔다. 월 4만 원이면 AS가 상시 출동한다는 점에서 안정감을 느꼈다. 몸집이 두툼해서 판매대 절반을 차지할 만한 기계였다.

북스토어의 100년 먹은 포스랑 씨름하던 기억이 났다. B가 매니저를 그만두기 6개월 전 드디어 4년을 기다려온 태블릿 포스가 북스토어에 도착했더럤다. 그간 B가 수기와 엑셀로 기록하던 것을 앱으로 옮기는 작업을 함께하면서, B는 기뻐했다. 관리하기 편해졌다며 자기 매장 기계 업그레이드한 듯 좋아하던 그녀가 선하게 떠올랐다.

" 동생, 나 앱으로 POS 해봤는데 편하고 좋더라. 보기에도 깔끔하고. "

" 엥? 언제? 언니가 언제 장사를 해봤어?"

" 아, 장사는 아니고, 돈 받은 것도 아니고. 알바도 아닌데... 근데 해봤어."

자원봉사라는 것이 설명하기 쉽진 않다. 눈감고도 할 수 있을 만큼 익숙한 Primary 국제학교 유치원 도서관 사서 일과 북스토어 일은 경력 단절로부터 탈출하기 위해서 썼던 많은 이력서 위에서는 한낯 문장 나부랭이 같아 보였다.

쓸데없는 일을 하는 데에 시간을 또 보낸 듯했다. 돈 되지 않는 일, 주부의 일이나 아내 또는 엄마라는 일과 같은 종류의 것 말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면서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 것들만 하면서 사는 투명인간 같은 짓거리만 하고 돌아다닌다며 싸잡아서 스스로 나무랐었다.


" 언니, 대박이다. 영어로 장사를 했단 말이야? 진짜 능력자야."

그런가 보다. 장사를 했다. 손님을 맞고 POS를 다루고 재고를 카운팅 했다. 오더를 받고, 주문을 전달했다.

소지하고 있는 태블릿이나 핸드폰에 앱만 깔면 되는 POS는 카드 단말기 가격 14,000이 지불해야 하는 전부다. 약정 기간은커녕, 추가 비용도 없다. 앱을 사용할 자신만 있으면 앱 POS를 사용하는 것이 어느 모로 보다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동생에게 큰소리를 쳤다. 앱 포스는 하루면 익숙해지고, 문제가 생기면 카톡으로 개발자분께 연락하면 되니까 나만 믿고 신기술을 사용해보자고 했다.


동생과 나의 가게 이름은 여왕의 오후다.

" 컴퓨터 실이 어딘지 아세요?"

" 오디토리움이 어딘지 아세요?"

" 카드 되나요?"

검은 혹은 하얀 피부의 전학생들과 여러 국적의 학부모들에게서 쏟아지던 질문에 답해주고, 도움을 주던 시간들에 대한 보답을 받을 차례인 것일까? 따뜻한 차와 달콤한 마들렌 한입 같은 시간이 내 삶에도 올까?

아는 이 하나 없는 밀라노에서 자긴 너무 심심해서 병날 것 같다며, 밀라노에 가면 의상 부티끄를 열고 싶다고 했던 B는 여왕의 오후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을까? 호박씨의 멋진 인도네시아는 지금은 어떤 당찬 삶을 살고 있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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