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독일에 주재를 나온 경유로 국제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이 많다. 아빠들이 엄마의 해외 이주를 위해서 휴직을 내거나, 아빠의 직업이 프리랜서인 경우도 많아 가족단위로 함께 해외로 움직일 수 있다. 부러운 일이다.
처음에는 작은 아이와 같은 반이었다. 고집도, 자기주장도 뚜렷하고, 감수성도 예민한 작은 아이는 여자아이라서 그런지 친구 만들기가 쉽지 않았다. 남자아이들과 친구인 경우가 더 많다 할까? 당시는 딸아이의 절친이 늘 남자아이인 것이 나로서는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아서, 어떻게든 여자인 친구들을 만들어줘야겠다 싶었다. Open house 데이, 유치원 개학식 날은 모든 부모들도 함께 교실에서 가족단위로 선생님과 만나 인사를 한다. 그렇게 선생님과의 만남은 학부모까지 얼굴을 트고, 인연이 되는 자리다.
첫날이라고 했다. 엄마는 미국인, 아빠는 네덜란드인이었다. 새로 왔구나. 잘됐다. R은 엄마가 미국인이니 영어도 훌륭할 터이다. 먼저 다다가 인사를 청했다. 작은 체구의 R엄마는 유럽계거나, 유태인이겠다 싶다. 알고 보니 R의 오빠는 아들과 같은 학년의 남자아이 N. 이보다 더 완벽한 조합이 어딨을까? 두 아이들이 한꺼번에 플레이 데이트를 하면 되겠구나. 계 탄 기분이었다.
R의 엄마는 첫날 이후로는 만날 수 없었다. 핸드폰 번호와 이메일 주소만 주고받은 후, 내가 플레이 데이트 약속을 잡기 위해 얼굴을 마주한 이는 R의 보모인 D. 크로아티아인인 D는 긴 금발에 반짝이는 눈을 가진 젊은 할머니였다. 운전도 잘하고 R과 N과도 잘 놀아주고, 영어와 독일어도 잘하는 D는 왜 여기서 보모를 하고 있을까?
첫여름방학을 맞아, R 엄마가 연락을 했다. 수영복을 챙겨서 두 아이 모두 본인 집으로 보내라며 D가 잘 돌봐줄 거라 했다. 그리고 찾아간 R의 집. 커다란 수영장이 딸린 Bad Hombug 숲 속 근처의 고즈넉한 저택이었다. 이런 집엔 언제 살아보게 될까? R 엄마는 일하러 나가고 대신 나를 맞은 D에게 태연한 척, 놀라지 않은 척하며 집이 참 좋네요라고 뭉뜽그려 말했다. D는 아무 감흥이 없다. D의 집도 아니니까. 하지만, 나는 감흥이 높다. 얘들을 이런 집에 살게 할 수 있는 R에게 질투가 나서 쓰러질 지경이다.
5시간이나 후에 오라며, 푹 쉬라는 할머니 D의 배웅을 받으며 나온 나는 뼛속으로 바람이 지나가는 것 같다. 텅 빈 느낌. 밧홈북 쇼핑 타운이 코앞이지만, 바로 집으로 돌아와 아이들이 어지러 둔 거실에 앉아있었다.
" 짜증 나."
절로 흘러나오는 말.
그다지 덥지도 않은 독일의 여름을 피하고자 시립 수영장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가곤 했다. 우리에겐 훌륭하다. 가족권 만원에, 프레첼과 핫도그, 감자튀김도 3천 원이면 산다. 2만 원이면, 대형 풀에 어린이 풀까지 딸린 시립 수영장을 내 것처럼 하루 종일 즐길 수 있음에 감사해하던 내가 우스워진다. 집에 수영장이 있다면 말이다. 수영장 관리인까지 있는 사람이 내 속을 들여다보았다면 비웃었을지도 몰라라는 생각에 이르자 거실 소파에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청소기를 돌리고 어질러진 거실을 정리했다. 너른 거실 창문 앞에 대자로 누웠다. 아직 아이들을 데리러 갈 시간은 2시간이 남았다. 독일 부동산 웹사이트를 열어 R의 집 월세는 얼마인지 알아본다. 주재원으로 독일에 온 덕에 한국에서 보다 1.5배로 늘어난 월급으로 월세는 낼 수 있겠다. 월세만 내면 뭐하겠는가? 지하와 2층이 있고, 수영장 그리고 정원 관리인까지 부리려면 월급으로는 모자라다. 상상의 나래를 펼쳐본다. 한국보다야 상대적으로 저렴한 저택이다. 한 번 사는 거 홧김에 이사가 버릴까 보다. 온몸이 부서질지언정, 정원 관리는 내가 하지 뭐.
30분 정도 일찍 데리러 갔다. D할머니는 얘들 넷을 돌보니라 피곤한 기색이다. 넓고 하얀 부엌에서 과일을 꺼내오며 먹고 가라고 권한다. 아이들이 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속상해.
달래 아이들을 데리고 나오자마자 R 엄마에게 문자를 했다.
" 너의 집 수영장 정말 훌륭해. 오늘 하루 잘 놀다가. 정말 고마워. 다음엔 우리 집으로 초대할게."
우리 집에 초대해야 하는데. 그럴 차례인데....
예의 바르고 짧게 온 R엄마의 답장.
" O.K."였다.
나의 하루 중 5시간 동안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나와는 달리 R 엄마는 고부가가치의 금융업무를 보면서 돈을 벌고 있었을 테다. 자녀와 돈에 대한 생각은 단 1초도 하지 않는 전문 금융인의 모습이 그려졌다.
꿋꿋이 그 집 아이들을 초대했다. 우리 집의 장점은 플레이 데이트를 해도 아이들끼리 걸어오면 된다는 사실이다. 학교 정문에서 가장 가까운 집, 교실 밖을 나서면 처음 보이는 집이니, D 할머니가 다 놀고 픽업만 하면 된다. 수영장과 견줄 만한 조건이다라고 여기며, 온갖 한국 음식을 해댔다. 만두, 불고기, 뿌셔뿌셔. R과 R의 오빠도 D할머니가 데리러 오니 좀 더 놀고 가겠다며 징징거려서 나를 뿌듯하게 만들었다.
그래. 얘들 노는 게 별 거 있는가? 마음이 중한 것이지 조건이 중한 것은 아니야 라며 나를 달래고 또 달랜다. 아직 아이들은 어려 다행히 R네 집 같은 곳에서 살고 싶단 소리 안 하니 말이다. 호박씨 내 정신줄만 붙잡으면 된다.
자본주의 세상을 사는 우리는 엄연히 돈으로써 사회적 가치를 매긴다. 공동체 안에서 사회가 나에 대해 인정하는 바는 돈을 매개로 헤아려진다. 부모가 아녔을 때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 부모가 되고 나니 눈앞에 덜컥 다가온다. 한국 학교에서는 느끼지 못했을 것을, 전 세계의 다양한 인간과 삶이 모인 국제학교에서는 뼈가 저리게 느껴진다. 어떻게 해야 내 마음의 평화를 불러올까? 어떻게 해야 가치 있는 삶을 아이들에게 보여줄까? 삶이 내게 던지는 돌멩이, 그것이 국제학교였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