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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박씨 Aug 02. 2022

호박이 넝쿨째 여왕의 오후에

강남역까지 개통되었던 신분당선이 강북까지 연결되었다. 여왕의 오후로 출근하는  8시 30분 언저리 강남역에서  빈 객차로 자리를 골라 앉던 상황은 더 이상 없다. 이럴 땐 눈치 작전을 펼친다. 가만가만 앉은 사람들의 관상과 차림새를 살핀다.


먼저 양재역.

양재역은 연세 있으신 분들의 직장이 있는 경우가 있는 것 같다. 그러니 일단 먼저 다가오는 양재역에서 내릴 듯 해 보이는 승객 앞에 서 본다.

실패  확률이 낮은 편이다. 아침 시간 신분당선의 평균 연령이 낮으니  양재역에서 내릴 만한 이를 찾기 어렵지  않다.


다음은 판교역. 우르르 내리기 때문에 보람은 없다. 판교역까지 서서 가려면 10여분 싸늘한  에어컨이라도 피할  자리에 서 있는 것이 제일 좋다. 가방에서 긴팔 니트를 꺼내  입고 판교역에서 내릴 만한 이, 한껏 멋을 낸 아가씨나 명품 백팩을 든 한국의 실리콘 밸리 인재 옆에 서본다.


오늘은 운수 대통. 아침이면 나를 찾아오는 허리 통증 때문에 앉아서 가구 싶다 했다. 쓱 둘러보고 욕심 없이 아무 데나 섰는데 바로 뒤에 자리가 났다. 오예. 엉덩이부터 밀어 넣어본다. 이렇게 복 터진 삶이라니.



오픈 2주 차. 지하철을 타고 1시간의 출퇴근을 할 수 있음에 감사하다. 신이든 운명이든 그 무엇에게든 고마움을 느낀다. 공황발작으로 선바위역에서 눈물, 콧물 짜내며 꼼짝 못 하던 나를 잊지 않는다. 예고 없이 다가오는 사고라 이름 붇인 그날은 요새 출근길을 매일 환하게 비춰준다.


자, 이제 종점인 광교 중앙 역을 향해  간다. 텅 빈 지하철 내 것인 양 마음껏 글을 쓸 수 있는 시간 10분이 내게 주어진다. 강남서 광교까지 알바 출근을 하니 가성도 효율도 떨어지는 일이라고?

아니. 전혀 그렇지 않다. 지나간 고통을 의미 지으며 온전히 호박씨로서 글 쓰는 시간은 축복이다. 호박이 넝쿨째 들어온 듯 복스러운 삶. 그것이 지금의 나다. 필명은 누가 지었는지 끝장나게 잘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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