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걷고 쓰고, 쓰고 걷는 인간

by 호박씨


쓰는 인간과 걷는 인간 중에서 한참을 고민했다. 그러다 둘을 한꺼번에 쓰면 어떨까 싶다. 쓰기와 걷기는 사실 떼어내기 어려운 관계다. 그 둘을 동시에 시작했다. 쓰기가 어려울 땐 걸었고, 걷기 어려울 정도로 괴로운 날엔 엉덩이 붙이고 앉아 쓰는 것이 진통제처럼 괴로움을 덜었다. 걸으면서 쓰는 인간, 이거 괜찮은데?

"아직도 운전을 못하니?"

비수처럼 꽂혀들어온 '시'자 들어가는 이의 질책이 떠오른다. 운전을 못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것이라 둘러대고 싶다. 독일 외곽의 삶이란 자차 없이는 불편하기 짝이 없다. 꼭 필요한 순간에는 운전을 한다. 안 하고서는 못 배기는 상태에 이르러서야 차를 탄다. 그런데, 버스 건 택시 건 승용차 건 차만 타면 기분이 나빠진다. 머리가 띵하니 아파지고 속도 울렁거린다. 5,6살의 나는 남태령 고개에서 멀미를 참다 참다 토하곤 했고, 엄마는 택시 기사에게 구박을 먹었더랬다.

걷기를 선택했다. 타고나길 자동차 문명과는 안 맞는 인간인 것을 어쩌겠는가? 아이를 유산하고 생긴 허리 통증은 유산이 아니었어도 일관성 있게 걷는 인간, 나를 완성하는 조건이다. 하루 걷기 총량의 법칙이랄까? 만보에 못 미치면 고만 다음날은 허리가 티를 낸다. 좀 더 걸었어야지!

5년을 걷던 독일의 검은 숲이 그리웠다. 초세권, 도서관, 학원가. 아이들 위주의 조건들 속엔 나를 위한 배려는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코로나 덕이였다. 외출하면 안 된다니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걸을 자유를 박탈당한다는 것은 숨쉬기를 제한받는 우주인의 삶처럼 느껴졌다. 공황장애는 마스크 없이 온전히 숨 쉬며 걸을 수 없는 상황 때문에 초대장 없이도 나를 찾아왔을 것이다.

어떻게든 걸을 공간을 찾아서 헤매다 보니, 산과 산책길 두 가지를 가지게 되었다.

산은 법원 뒤로 난 가파른 미도산이다. 생명력 강한 아카시아가 산의 주인이었던 야산은 고속터미널의 쇼핑가, 국립도서관, 법원이 가지는 문명의 숨 막힘 속 오아시스다.

산책길은 경부고속도로를 따라 신논현역과 양재시민의 숲을 연결한 길마중길이다. 고속도로 방음벽이 길 한편을 막아, 좁고 긴 산책길이다. 독일 헤센 주의 검은 숲에서 누리던 호사는 기대할 수 없다. 그럼에도 방음벽의 무채색을 덮은 담쟁이덩굴과 방음벽의 그늘을 이기려고 하늘을 향해 뻗은 늘씬한 은행나무들을 보면 씩씩해진다. 자연의 팽팽함이 나를 깨우쳐 주는 길이다.

산은 걷고 나면 글이 떠오른다. 가파르고 오름길의 폭이 좁다. 한 발자국씩 발 디딤에 생각하다 보면 문장이나 단어들은 떠오를 틈이 없다. 또, 미도산은 주로 아이들을 걷게 만들 요량으로 끌고 가다 보니 글에 대해 생각할 겨를은 없는 편이다.

신기하게도, 돌아와 따뜻해진 발은 키보드 앞으로 나를 이끈다. 정수리 끝에서 발바닥까지 혈액순환이 제대로 되는구나 싶을 만큼 뜨끈해진 발바닥을 느낀다. 심장을 지나 뇌 또한 산소 공급 제대로 받으니 글이 쓰고 싶어진다. 등산으로 노곤해진 아이들, 에너지를 쓴 그들이 잠잠해지는 순간 고요한 마루 구석은 내 차지다. 정적이 흐르는 집엔 타타탁 키보드 소리가 명랑하게 날리면 글자가 흰 화면을 젖히며 달려나간다.

산책길은 기도에 가깝다. 곱씹게 만들어 우는 때가 종종 있다. 혼자 걷다 보니 비슷한 시간 때에 마주치는 이들도 있고, 풍광도 익숙하기에 이르러 생각의 길에 풍덩 빠질 수 있다. 위로가 된다. 엉망진창으로 뒤엉켜 버린 감정과 후회가 밀려온다. 눈물로 씻어내본다. 괜찮다. 나무도 그 자리, 담쟁이도 그 자리에 그대로다. 어떤 일이 내게 일어났고, 어떤 어리석은 감정을 표했건 뜨거운 한 방울 이 길 위에 뿌리고 나를 토닥여주면 그것으로 그만이다.

별일 아니었다 싶은 순간이 찾아오면 단어와 문장들이 길을 따라 떠오른다. 놓치기 싫을 만큼 꽤 괜찮은 첫 문장이 떠오르면 핸드폰을 꺼내 부랴부랴 녹음을 한다. 순간을 잘 잡아내는 형용사가 떠오르면 몇 번을 되뇐다. 말없이 어디도 들르지 않고 뭐 마려운 사람처럼 바지런히 집으로 돌아와 노트북 앞에 앉는다. 시간이 풀어헤쳐지는 순간이다. 고민 해결! 글을 써내리고 나면 박제사가 된 기분이다. 찬란하게 날아다니던 새파란 나비를 잡아 고이 박제하면, 얼마나 보기 좋은지! 산책길에서 떠오른 글은 단숨에 쓰고 다시 보아도 흐뭇하게 마음에 들기가 대부분이다.

글을 쓰는 인간으로 살고 있는 내가 마음에 쏙 든다. 처음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는 누구에게도 말하기 부끄러웠다. 이젠 말이 통하는 이에겐 자꾸 글쓰기를 권한다. 하다못해 메모나 짧은 기록이라고 하라고 한다. 흡사 전도 행위에 가깝다.

걷는 인간으로 사는 것 또한 소중하다. 쓰는 인간이라는 정체성 보다 권하기 어렵긴 하다. 자율 주행이 나오는 시대에 걷기 전도사라니 말이 쉽게 통할 것 같지 않다.

그럼에도 오래간만에 만나는 귀한 인연을 만나면 때에는 특히 걷기를 한 번은 대화 사이에 교묘히 섞어 본다. 1,2년 만에 보는 이들 대부분 이제 40대 중반을 지나가니 노화가 진행되고, 건강을 걱정한다. 기회다 싶어 잽싸게 '걷는 인간, 호박씨'를 광고한다.

" 지금 이 순간, 그대를 만나 웃는 낯으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은 걷기 덕분입니다. 공황장애도, 부모 됨의 고충도, 중년의 무게도 저는 걷기를 통해서 짊어지고 나아가는 중입니다. "

눈을 맞추며 대화하는, 건너편의 소중한 이에게 메시지를 꺼내어본다. 삶의 길을 기록하고, 걸으며 살아감을 함께 하고 싶어서이다. 스치는 인연들 모두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라 조개가 진주를 품고 살 듯 조심히 꺼내어 보인다.

지금 글을 쓰는 순간 또한 그 노력의 일부다. 여기까지 이 글을 읽어준 이에게 주문을 걸어본다.

오늘도 걷고, 쓰시길!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40대 경단녀에게 구정의 쓰임이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