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간 출장이라고 작은 아이에게 알리고는 새벽 비행기로 어디론가 남편은 떠났다. 남편 스타일대로 방이 어질러져 있다. 금연을 하려는지 까먹은 목캔디와 재산 정리로 연일 날아오는 부산 세무서의 우편, 마른 발 뒤꿈치 각질 침대 옆 협탁에 놓여있다. 협탁은 정리해 주면 티가 날 것 같다. 침대와 마주 보고 있는 책장을 치워야겠다.
아버님의 흔적들이 남아있다. 아산 병원 암병동 영수증과 남편 혼자 답사를 갔던 용인 추모공원 브로셔가 있다. 어머니 뜻대로 아버님은 부산에 모셔졌고, 근교로 정하려고 했던 아버님의 납골당은 여전히 멀리 기장시에 있다. 명절에도 가시지 않는 어머니는 왜 아버님을 굳이 해운대 자택에서도 1시간이나 걸리는 추모공원에 구역 모셨는지 알 수 없다.
세뇌당했다는 표현을 옳을지 가스라이팅 됐다는 표현이 맞을지 잘 모르겠다.
" T는 내 인생 최대의 선물이야. 최고 행운이야. 전 우주에서 제일 소중하지."
단 둘이 마주할 시간은 보통 새벽부터 준비한 아침 식사가 끝나고 체력이 탕진되었을 때다. 타원형 식탁의 구석자리는 어머니 자리다. 의자가 부족해서 등이 없는 철제 의자를 식탁의자들 사이에 끼워 두면 자리 하나 마련이고 거기에 내 자리다.
시누들이 없을 때는 그나마 다행이지만, 시누 한 명이라도 일어나서 부엌에서 푸닥거리는 날엔 오전 10시면 영혼의 10% 정도 남아있다. 방에 들어가서 눕고 싶다. 어머니가 식탁에 앉아 과일 수혈을 하시기 시작한다. 과일을 깎아야겠지 싶다. 과일 먹기가 그녀만의 힐링이다. 장은 안 좋으시지만 피부관리는 철저하고시다. 대구서 자란 어머니는 과수원을 하던 친척이 모여 살던 집성촌에서 자라셨다. 찢어지게 가난한 어머니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어머니 입장에선 풀 반찬이 제일 싫었고, 먹을 수는 없고 내다 팔아야 하는 과일이 보약이다. 깎아 드리지 않아도, 본인이 알아서 잘 챙겨드시지만 난 며느리니까 그리고 우리 엄마 부엌에 혼자 있는 꼴은 절대 싫다던 사랑하는 남편의 엄명이 있었으니 권해본다.
"제가 깎을게요."
그럼 이제 어머니는 레퍼토리를 시작하신다.
점을 보러 갔는데, 아들 T가 태어나던 해에 나의 운이 최고였다더라. 내 생의 모든 운은 T를 낳던 해가 피크였다 신다. 부산의 큰 절로 일주일에 두세 번은 가시고, 매일 아침 불경을 필사하는 어머니는 20년 전에만 해도 용하다는 점집을 찾아다니곤 하셨다. 점을 봐주는 스님들도 많고, 부산의 연배 있으신 분들에겐 미래를 예지 해주는 유명한 스님들도 있는 것 같다.
그 스님들은 어머니 말씀에 따르면 어나더 레벨이다. 스님이지만, 상대한다면 여자 10명도 한 번에 해치울만한 기력을 가진 이들이고 경남 지방에서 성업 중인 L사의 호텔에서는 알아서 VIP 대접을 해준단다. 그러니 스님들의 말에 귀 기울여 야한다는 것이 어머니 믿음의 기반이다.
" 나는 T가 딸이었으면 다섯 째도 낳았을 거다. 남들 다 아들 있으니 나도 아들이 있어야지."
소원했던 바가 이루어지는 해는 어머니 인생 최고의 해였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니, 우주에서 최고로 귀한 내 아들을 아껴주라 하신다. 이게 결론이다. 1년에 서 너 번을 같은 스토리를 전하시고 결론은 변함없이 내 아들 대접해 주라 신다.
책장을 정리하다 보니, 아이들의 기록이 나온다. 네이티브 뺨치게 영어를 하는 딸은 소리 나는 대로 오늘 엄마와 오빠, 그리고 아빠 친구 가족과 재밌게 놀았다는 내용으로 간신히 이해되는 영어 일기를 써뒀다. 한 자 한 자 눌러쓴 필체에서 딸의 기쁨이 묻어난다. 남편의 대학 동창이었던 K는 구매대행업을 하겠다고 회사를 그만두고 강남 집 전세금으로 독일로 왔었다.
2015년 4월 K의 가족들이 뒷달아 독일로 들어오고 K와 K의 와이프는 프랑크푸르트 외곽의 시골동네에서 사업을 자리 잡게 하려고 고군분투했다. 그들의 집은 강남 아파트와는 거리가 멀었고, 주거환경은 서울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K는 회사원이 아니었고, 안정적인 수입을 얻을 수 없었다. K의 와이프는 강남 아줌마가 아니라, 남편 사업을 위해 잠 못 자고 구매 대행할 상품들을 업로드하는 일꾼이었다.
남편은 K가 안타까워 주말이면 늘 K 가족을 불러 삼겹살 파티를 하자고 했다. 멍청하게 늘 남편의 청에 응했던 것은 물론 나다. 음식 차리는 거야 그렇다 치지만, K와 K 와이프의 불안하고 부정적인 기운은 참기가 쉽지 않았다.
K가 가장 많이 했던 말은,
" 나 귀하게 자랐는데."
였다. K의 아버지는 옛날 은행원으로 러시아 주재원이셨다. 러시아에서 자란 K는 아들 셋의 막내아들이다. 러시아에서 주재원으로 지내던 이야기, 아들 삼 형제의 막내로 자란 본인 이야기 썰은 들어주겠는데 귀하게 자랐단 말은 들을 수가 없었다. 귀를 막던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던지 해야 했다.
K 와이프는 부엌에 들어와 한 주간 남편 돕니라 고생한 이야기를 하며, 식기 세척기에 접시들을 정리해 넣곤 했다.
" 저 잡지에 아동 모델이었잖아요. 저희 사촌 언니가 성우 부부여서 목소리만 딱 들으면 알아요."
한 주간 고단 했던 그녀는 캐나다에 주재원으로 갔다 눌러앉게 된 큰 언니와 잘 나가는 작은 언니 그리고 인물 좋은 자신과 그녀의 동생에 대해 말해준다. 안 궁금한데 계속 말해준다. 결론은 귀하게 자랐다 이다. 괜찮은 집안에서 고이 자랐는데 남편 잘못 만나 멀리 독일에서 이 고생을 하고 산단다.
귀하게 자랐다는 말을 하는 이가 주변에 많다. 귀하게 대해주라고 내게 요청하는 이도 있었다. 어려운 부탁을 쉽게들 하며, 꺼내지 말아야 할 소리를 쉽게 내뱉는다.
귀하게 자랐다면, 남은 상대적으로 덜 귀한 가보다. 나를 제외하고 세상은 모두 남으로 이루어져 있다. 부모라는 업을 맡기로 한 이들도 남이지 '내'가 아니다. 그들은 피가 섞였다는 이유로 당신을 귀하게 대해주었고, 자신을 희생해 가면서 당신을 키웠다. 그러니 당신은 그들에겐 귀한 존재가 맞다. 그러니 희생하여 여기까지 당신을 이끌어준 부모를 귀하게 대하면 된다.
이 귀함의 방정식은 오로지 이 관계 속에서 등식이 성립한다. 각각의 가정에서 서로 귀하게 대해줌을 주고받았다면 이제 세상에 적용시키면 된다. 적용 방법에 대한 착각을 하는 이들이 많다. 가정에서 당신의 부모가 당신을 귀하게 여겼으니, 내게 당신을 대접하라는 요구는 할 수 없다. 나 또한 소중한 누군가의 딸이니까. 당신이 만나는 모두는 어떤 어머니가 하늘이 노랗게 될 정도로 아파서 소리 지르다 울부짖다 감격에 겨운 눈물을 흘리며 나은 아기였다.
어머니, 정신 차리세요.
귀하게 자란 K와 K의 와이프는 별거 상태다. K는 독일에, K의 와이프는 한국에 와 있다. 고이고이 자란 내가 너를 만나 이 모양이라며 악다구니를 쓰던 부부는 서로를 향해서 외치다 승부가 나질 않아 결국 떨어져 지내게 되었다.
" 오늘은 진짜 행복했다."
딸의 삐뚤한 글씨에 주르륵 눈물이 흘렀다. 한국에 도망치듯 떠나온 K의 와이프는 연락 두절이라 딸은 K의 아이를 만난지 벌써 5년이 지났다. 행복했던 기억들은 딸의 기억 속에 접혀 있다.
독일서 친구가 없던 딸이 안타까워 K의 식구들을 매번 데려다가 주말에 밥을 헤먹였다. 그게 나의 꿍꿍이였다. 내게도 제일 귀한 것은 딸이니까. K의 딸은 힘겨운 부모님의 상태를 이해하고 스스로라도 말썽 없이 잘해야겠다고 철이 들어버린 첫째 딸이다. 그러니, 겨우 삼겹살과 각종 간식거리, 장소 제공 만으로도 우리 딸의 친구가 되어주었다. 나를 희생해서라도 딸에게 또래 관계를 만들어줘야겠다고 마련한 자리였지만, K의 딸과 딸아이를 다르게 대한 적은 없었다. 그것만은 지켜야 했다.
그래야만 그들과 나는 다른 사람이다. 귀하게 자랐다고 떠들어대며 대접해 주길 바라는 이들과는 다르게 살고 싶다. 귀한 내 새끼 잘해주라고 순진한 척 강요하는 이와 똑같이 살기는 싫다. 글을 남길 수 있는 이유는 단 하나다. 그들은 내게 모두 같은 무게를 가진 이들이다. 이 생각으로 살아간다면, 호박씨는 계속 글을 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