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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 경단녀에게 구정의 쓰임이란

by 호박씨

구정이라 가족들이 모두 모인 자리, 교원시험을 재수하는 남편의 조카가 유일한 20대였다. 27살. 남편을 처음 만나기 1년 전 인가보다. 한의대 시험을 2번 준비하고 돌아서선 작은 아버지가 소개해주신 중소기업에 들어갔을 때가 27이었다.

길가에 이름 없이 핀 꽃이나 내일이면 생을 다하는 하루살이 같다 생각했다. 강남 사는 친구는 강남 사는 과 선배와 결혼을 했다. 선배의 친구들도 다 얼굴을 아는 이들이었고, 친구의 아버지는 반대하던 결혼이라도 멋있게는 하셔야겠기에 선배 친구와 우리 무리들을 부르셨다. 선배 친구들도 주재원, 또는 외무 관련 일을 하는 집들이라 특례도 같은 대학을 다녔던 이들이다. 취집이라도 가야 나란 존재는 인정받으려나 싶었다.

한 상에 마주 앉은자리. 친구도 선배도, 선배의 친구도, 모두 대기업 입사 1,2년 차였다.


"과외해요."

대기업 오래 다니신 친구아버지는 리더십이 넘치신다. 딸 친구와 사위, 사위친구들 이 젊은이들의 모임을 주최하시고 이끄신다

자기 소개해보라며 분위기를 돋우시는데 주저 없이 솔직하게 말했다. 난 그때 과외를 하고 있었으니까.

있는 그대로 말해야지 적어도 내겐 부끄럽지 않다.

내 소개가 끝나자 흐르는 정적을 고스란히 피부로 느끼며 생각했다. 오지 말 것을, 취집이라도 가겠다고 빼입고 화장하고 이 자리에 앉아있구나. 나란 존재는 얼마나 순진한지.

취직을 해야 시집이라도 가겠구나 싶었다. 작은 아버지와 아는 회사라면 그래도 일말의 존중은 받겠지 싶어 들어간 회사였다. 시집만 가자 싶었다.

과외 말고도 내가 세상에 이바지할 바는 있겠지.

수능시험 말고도 내가 잘할 수 있는 것 한 가지는 있겠지.


"교육감 한다며?"

선생님이란 직업 딱히 별로라는 조카의 말에 다들 한 마디씩 한다.

"교육사업 하자. 삼촌 퇴직준비로."

남편이 건넨 제안에 조카의 아버지, 아주버님이 황당해한다. 사업은 무슨 사업이냐고 하자,

"숙모가 과외 오래 했으니 노하우가 있잖아. 현직교사 좀 하다가 교육사업 하자, 조카야."

남편이 나를 이야기의 링 위에 올리니 시누가 부랴부랴 나선다.

" 어디 과외선생을 교사에다 갖다 붙이냐? 비교할 것을 비교해야지."

주방에서 김밥을 싸던 중이었다. 이미 내가 싼 김밥으로 한 상이 벌어져있었다. 독일서 하도 밥을 하다 보니 김밥은 일도 아니지만 20줄 넘게 싸는 일은 시간이 걸리긴 한다. 입이 많으니 스무 줄 싸둔 것은 어느새 사라져서, 어머니는 얼른 밥을 새로 해야겠다며 쌀은 씻어 앉히셨다.

두세 개 먹고 나니 밥 다된 소리가 난다. 잠시 붙였던 엉덩이를 띠고 김밥을 싸러 가야 한다. 그러라고 밥 하셨으니 말이다. 주방에서 없는 듯이 열 줄 넘게 김밥을 싸고 있고, 나의 과외 경력은 그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깜도 안 되는 과외선생은 현직교사라는 직업의 이름 옆에 잠시 붙었다 떨어진다.


나의 출근과 디저트 카페는 그 누가 묻지도, 궁금해하지도 않는다. 오늘도 출근하고 홀로 매장을 청소한다. 누구도 궁금하지 않은 40대 주부의 경력이음은 내겐 가장 소중한 일이니까.

나를 찾는 것은 내겐 가장 중요한 일이니까 나라도 내 이름을 찾아줘야 한다. 사라져 버린 내 시간의 의미와 노동의 가치는 오직 스스로의 인정으로부터 살아날 수 있다. 혼자인 이 시간은 값지게 내게 돌아올 것이다. 토닥토닥. 토닥토닥. 안아줘 본다. 수고했어, 나.


구정을 잘 넘겨보려고 시댁에 가져간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보고 반겼다. 읽고 싶었다기에 기뻐서 조카에게 선물로 주었다. 그녀와 작가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려니 주방에서 부르는 소리가 나 대화는 곧 끊겼다. 오늘 나의 쓰임은 조카와의 대화상대는 아니니까. 나에게 책에 관한 이야기를 건넨 조카가 예쁘다. 빛나는 젊음이고 귀한 딸이다. 그녀와 빨치산에 관한 주제를 나누는 나도 예쁘고 귀하고 젊다. 그리 생각하고 살 것이다. 잊지 않고 귀하게 아껴줘야지. 내 쓰임은 누가 뭐래도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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