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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승하며 기분도 환승

by 호박씨

"누구 덕에 이만큼 사는데."


누구 덕일까? 모두의 덕일 것이다. 나의 행복을 빌어주는, 나를 소중히 여겨주는 이들의 관심으로 여기까지 왔을 것이다. 그중 한 명은 남편이겠지. 남편이 말하는 누구는 누구일까?

시부모님과 남편 자신을 말하나 보다. 한껏 화가 난 그가 지목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다.


화가 나면 예금에 넣어둔 돈을 송금하라고 한다. 1억이 조금 안 되는 그 돈은 나의 명의로 관리하고 있는 중이다. 10년 넘게 남편은 본인 용돈 제외하고 월급을 모두 보내준다. 얼마 안 되는 월급이라며 돈관리는 와이프가 다 하면 된다고 해왔으니 십여 년 넘게 월급과 생활비, 재테크도 내 몫이었다. 분양받겠다고 계약금 명목으로 빼둔 여윳돈도 내 명의로 관리 중인 것이다.

지난 부부싸움들에서는 흥분하면 그 돈 보내라고 소리를 질러대는 통에 엉겁결에 예금을 깨기도 했다. 오피스텔이라도 얻어서 나가겠다고 지금 당장 보내라고 했다. 앱뱅킹은 손쉽다. 1분도 안 걸려 예금 해약, 이체까지 가능하다.


관리인으로 사는 가보다. 그가 맡겨둔 얘들 관리인. 시부모님이 맡겨두신 돈 관리를 하는 것이 나라는 사람인가 보다. 얌전히 잠자코 얘들 공부 서울대 갈 만큼 만들고, 많이 주든 적게 주든 보내주는 생활비로 퇴근한 남편 9첩 반상 차려내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착하다 소리를 들었을 테다. 말 잘 듣네 했을 테다.


25일 월급날이 다가온다. 생활비를 보내줬나 싶어 뱅킹 앱을 열었다 닫는다. 그렇다 숨이 가빠오고 뒷목이 뻣뻣해진다. 그에게 사과를 받겠다고 내가 지키고 있는 침묵의 대가는 돈이구나 싶다. 어제부터 식욕이 없고 먹기만 하면 화장실 행이었던 원인은 이것이었나 보다. 잔뜩 신경을 쓰고 있었다.

내가 무능력하구나 싶다가 왜 이런 사람은 선택했을까 싶어 스스로가 더 한심하다. 나무라본다. 나를 여러 가지 면에서 혼내본다. 무능력함에 보는 눈 없음이라는 두 가지면 스스로를 혼내주고도 남는다. 주르륵 마스크 위로 눈물이 흘러내린다. 이 타이밍에 휴지는 왜 한 장도 없는 걸까?


아들을 만나러 간다. 방학 2달 동안 아이는 많이 바뀌었다. 내 전화를 받고, 언제 퇴근하냐고 전화를 하기도 하고 눈을 맞추고 이야기를 한다. 주변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고, 함께 외출하기를 기꺼이 시도한다. 남편과의 불화로 살고 싶지 않다는 단어가 붕 머릿속을 떠도는 찰나에 아이에게 전화가 온다.

"엄마, 버거킹이 교보문고에 있는 곳 말하는 거지?"

"아니야, 아들. 고속터미널 버거킹."

복잡하고 넓은 고속터미널의 어느 쯤에서 접선해야 할지를 설명해 준다. 덕분에 차분해진다. 차근차근 우리가 고속터미널에서 갔었던 곳들을 아들의 머릿속에 떠올려주고, 네이버 지도 링크를 보내주었다. 마스크 위로 흘렸던 눈물이 말라 안경렌즈에 자국만 남았다.

이렇게 사는 건가 보다. 생각의 파도를 넘고, 감정의 태풍을 잠재운다. 어제의 나는 어리석고 연약했을지언정,

지금 이 순간 나는 아들에게 중요한 사람이다. 3월에 학교에 입고 등교해야 할 교복이 한껏 작아졌고, 아이에게 잘 맞는 교복을 골라 사줘야 하는 사람이 나다. 분명 5분 전 신분당선에서는 살고 싶지 않다 싶었는데, 2호선으로 환승하며 머릿속을 떠돌던 생각은 흩어져 사라지고 없다.

이렇게 지나가는가 보다. 어찌 되겠지. 좀 더 버텨볼 생각이다. 삶에게, 남편에게 어디 한번 누가 이기는지 보자고 해볼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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