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에 해운대 바다가 펼쳐져있다. 조선호텔이 엎어지면 코 닿을 곳인데 또 바다를 보러 가자 하셨다. 예비 며느리가 추석이라고 왔으니 괜찮은 구경시켜 주는 것이 예의라 생각하시는 눈치다.
남편이 될 예정인 남자친구는 아침부터 얼굴이 어둡다. 뭐 때문에 그런 건지 알 수가 없으니 주인눈치 보는 강아지 마냥 그의 눈만 계속 살폈다.
내년에 결혼하겠다고 했으니 추석에 예비 시댁에 가서 인사를 드리자 했다. 부산이니 1박 2일로 다녀오고 숙박은 곧 시댁이 될 예정인 집에서 해결하면 되겠다했다. 도착해서 저녁식사는 외식을 해서 괜찮았는데 문제는 다음날 아침이었다.
아침식사를 준비하시는 어머니의 부엌에 서있기도 애매하고 자고 일어난 구석방에 멍하니 있기도 어색했다. 일찍 귀가 안 들리셨고 과묵하신 어머니는 가서 쉬어라 또는 이것 좀 도와달라는 말 없이 아침 준비를 하셨다. 아버님도 남자친구도 자는 이른 시간, 달그락거리는 식사준비 소리에 잠자리를 털고 일어나긴 했지만 침묵이 흐르는 예비 시어머니의 주방은 무겁기만 했다.
아침을 먹고 우리 네 사람이 향한 곳은 송정이었다. 조용한 아침식사자리에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알 수 없었다. 남자친구는 식사시간 내내 내게 한마디 말도 걸지 않고 눈빛은 싸늘했다. 그가 운전해서 가는 동안에도 옆자리 앉은 나는 그에게서 시베리아한파 같은 냉기를 느껴 말 한마디 붙일 수 없었다.
송정엔 아담한 카페도 많은데 옛사람이신 시어른들에겐 카페에서 마시는 차보다 낯설고 돈 아까운 것이 없는지라 우리는 바닷가 앞 자판기로 향한다. 커피자판기가 어디 있는지도 잘 아셔서 자주 이용해 보셨구나 했다.
과수원집 딸이셨던 어머니는 지금도 차나 커피는 드실 줄 모른다. 밥숟가락 내려놓으면 과일을 챙기시는 어머니는 그날도 커피 자판기 근처에도 오지 않으셨다.
남자친구가 동전을 넣는다. 모카커피의 향이 씁쓸하게 스며들었다. 그에게서 커피컵을 받아 드니 그제야 우린 눈을 맞춘다. 12시가 다 돼서야 젊은 연인들은 얼굴을 마주했다.
" 엄마가 부엌에서 일할 땐 도와줬어야지. 방에 있지 말고."
그는 내게 커피를 내민다. 자판기 커피는 달디단데 무슨 맛인지 혀로만 느껴진다. 뇌는 커피가 무슨 맛인지 판단하기엔 바쁘다.
'이 사람하고 결혼해야 하나?'
그의 컴플레인은 길지 않았지만 첫마디를 듣고 나선 알아듣지 못했고 지금의 나는 기억도 하지 못한다. 한 문장으로 남자친구의 마음을 읽었고 그와의 결혼이 어떨지 필름처럼 머릿속에서 펼쳐졌다. 그는 어머니의 아들이고 그에게 나는 예비며느리다. 어머니께 효도하는 바르고 싹싹한 모범적인 여자로 보였기에 선택한 여자가 나다. 그가 내게 앞으로 무엇을 바라는지 선명하게 떠올랐다.
매장에 출근하면 제일 먼저 커피머신 전원부터 켠다. 머신의 예열에는 시간이 걸린다. 신분당선을 타고 가며 커피머신을 만나고 커피를 내려 고소한 카페인을 느낄 생각을 하면 설렌다. 문제는 이 설렘이 커피를 추출하는 버튼을 내리기 전까지 만이라는 것이다. 남편과 침묵하고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며 저녁식사를 따로 하는 요즘, 머신이 커피를 내리며 내는 소리에 나는 그날의 자판기를 떠올린다.
우웅하는 머신의 엔진 소리를 들으며 코를 간지럽히는 커피콩의 풍미를 느끼며 아픈 기억을 소환하는 일을 그만하고 싶다. 송정바닷가의 자판기를 잊을 만큼 즐거운 커피와의 일화를 만들어내야겠다.
여왕의 오후 카페바는 다시 살아내겠다고 스스로에 준 기회다. 살아야겠다고, 살맛 나게 살겠다고 내게 준 선물이다. 딛고 일어나자. 아메리카노를 내리며 춤이라도 추자 싶다. 아픈 기억이 나를 찾아오면 머리를 흔들고 노래를 부를 것이다.
커피가 무슨 죄람. 여왕의 오후 커피를 주문하는 고객에게 치유의 기운을 한 잔 가득 내어야 하는 것이 나의 소명이다. 오늘 내게 주어진 삶을 잊지 않고 즐기고야 말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