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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박씨 Feb 15. 2023

헤어지지 않으려면 미워하기

남편과의 카톡창은 12월 31일 대화에서 멈춰 있다. 오늘이 2월 15일이니, 나의 침묵은 45일째다. 

"너에게 여왕의 오후가 뭔데? 당신 공황장애만 나으면 다야?"

이기적이라는 말은 남편과 나에게는 데드라인 같은 단어다. 착한 부부, 그게 우리 부부의 테마였을 것 같다. 부모 말 잘 듣고, 누님들 말 잘 듣고, 시키는 대로 알뜰살뜰하게 사는 삶이 남편이 그리고 내가 암묵적으로 합의한 그림이다. 착하다는 말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말인 줄을 몰랐던 철부지였다. 

누나 많은 집 막내라 여자마음을 잘 이해하는 남자, 배려심 넘치는 인간,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띄지 않고 도리를 지켜가는 중도를 걷는 이. 남편은 그렇게 보이고 싶어 했다. 크게 맞장구치며 평생 격려하고 싶은 것이 소원이었다. 지금도 내 소원은 남편을 존경하는 것이다. 

그런 그는 '탓'을 한다. 지친 얼굴, 굳은 어깨로 화살을 돌린다. 순한 그의 눈빛은 얼어붙었고 넓은 그의 어깨는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15년 가까이 함께 했으니 어떤 말이 내게 상처일지 그는 잘 알고 있다.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그는 가장 날카로운 말을 고르고 골라 내 앞에 내려놓는다. 나는 그에게 흔들린다. 분노에 사로잡힌 그가 꺼낸 말이 내 심장에서 가까운, 보드라운 안심을 베어낸다. 나는 얼마나 남편에게 의지하고 살았던가? 


" 방학 동안 만이라고 알바 쓰라고 했지? 내가 돈 준다고 했잖아." 

돈이야기까지 나왔다. 남편과 한참을 함께 했다. 소개팅으로 남편을 만난 지 반년만에 양쪽 부모님들께 인사를 드렸다. 그 해에 결혼하는 것은 운이 좋지 않다며 점을 보신 시어머니가 다음 해로 결혼을 미루셨다. 우린 서로를 안 지가 20년을 채워간다. 돈, 공부, 아파트, 부모님 그리고 아이들. 어디에서 서로가 참을 수 없이 미워지는지 우린 가늠하며 지내고 있다. 그러니 그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 나도 동의한 것들이 차례로 그의 입에 오른다. 

돈, 공부, 가족, 아파트, 부모님 그리고 아이들. 이 중에 나는 없다. 내게 나 자신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을까? 남편과 나, 서로의 옆에서 건강히 숨 쉬며 잘 자고 잘 먹는 것보다 중한 것이 없을 터인데, 우린 타인보다 더 서로를 미워하고 있다. 



45일 동안, 나는 남편의 눈을 바라보지 않고 있다. 그에게 말을 건네지 않는다. 남편의 저녁밥을 차린다. 아이들도 함께 할 수 있는 밥상이면 잠시 아이들 방에서 기다렸다가 남편이 다 먹고 나면 그제사 나가서 저녁을 먹는다. 아침 시간에는 그가 나가고 나면 일어나 아침 준비를 하고 아이들을 깨운다. 마침 아이들이 방학이기 시작해서 그럴 여유가 있다. 

45일 동안 남편이 던진 문장들이 나를 찾아왔다. 어떤 날은 오른쪽 심장에서, 다른 날은 왼쪽 귀에서, 또 어떤 날은 남편의 표정으로 머릿속을 맴돈다. 

" 우리가 엉망진창인 것은 다 네 탓이야."

" 네가 너를 찾기 위해 여왕의 오후를 나가기 시작하면서부터 아이들이 이상해."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오라고 한 번도 말한 적 없는데 왜 남편의 모든 말들은 '제자리로 돌아와.'로만 번역될까? 나쁜 여자, 못난 엄마, 부족한 아내로 불리는 것이 두려운가 보다. 그의 말에 베이면서도 그와 대화하고 싶다. 사과받고 싶다. 제자리로 돌아오라고 소리 지르지 말고, 나의 변화가 불안하니 이야기 나눠보자 했으면 좋겠다. 


전업주부에게 남편은 세상을 보는 창이다. 70년대 생이고, 보수적인 호박씨란 이에게 아버지란 세상이란 바다를 해쳐가는 멋있는 등을 보여주는 어른이여야 한다. 내 옆에 있는, 나와 함께 사는 이는 변화를 싫어한다. 

옛 것을 좋아하며, 어른을 공경하고 질서를 사랑하는 인간이다. 그에게 거침없이 세상을 헤쳐나가라고, 돈 많이 벌어와 자본주의에서의 승자가 되라고 우기며 살아온 과거를 후회한다. 

아내이지만 남편일 수 있고, 엄마지만 아빠일 수도 있다. 세상을 헤쳐나가는 모습은 아빠만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세상을 보는 창은 남편만 하는 것이 아니라, 아내도 할 수 있다. 

그의 저녁 밥상을 차리며, 그가 벗어둔 빨래를 세탁해 널며, 하루에 적어도 한 번씩은 목 끝까지 그에게 할 말이 차오른다. 그가 나를 포기하기 전에 연습은 그만하고 입을 띠어야 할 터이다. 헤어지지 않기 위해서 미워하며 곁에 있는 일은 언제까지 더 할 수 있을까? 오늘까지는 침묵을 견딜만하니 말이다. 

비겁하게 좋은 여자 프레임 뒤에 숨지 말기를 내게 주문해 본다. 호박씨의 이름으로 살아내길 빈다. 부디, 착하고 나약한 어떤 여성으로 남지 않길 바란다. 호박씨, 용기를 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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