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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박씨 Feb 20. 2023

고무나무의 기운으로 미루어보아

"갤러리아가 코앞인데 우리한테 크리스마스케이크를 주문하다니  진짜 고맙다."

"응응응!!"

격하게 세상에 감사하던 2022년의 12월이 지났다.

크리스마스작업으로, 여왕의 오후 나름의 성수기로 매일 출근하고 평소보다 늦게 퇴근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빨랫감이 쌓였다. 얼어붙은 세탁기를 녹여서 빨래를 돌려야 하는데 퇴근하면 꼼짝하기 힘들었다. 호스를 분리하고 끓는 물을 1시간 정도 부었던 작년의 성공경험을 되풀이하면 된다. 누구도 대신할 사람이 없다. 그러니 빨래는 쌓여가기만 했다.


큰아이는 방학이 조금 일렀다. 아이 혼자 지내는 1주일 정도가 펼쳐졌다. 퇴근해 보면 아침에 나간 자세 그대로 침대로 누워있는 아이가 보였다. 무기력함, 식욕저하는 나도 잘 아는 증세다. 아이를 도울 사람은 나뿐인 걸까?


크리스마스가 지난 주말이었다. 동생과 케이크 판매에 대해서 되돌이켜보고 내년을 기대하는 대화를 나눴다. 피곤했지만 여왕의 오후라도 궤도에 오른다면 뭐든 해낼 수 있다는 기운이 차오를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리고 걸려온 전화.

" 엄마는 아빠를  왜 저렇게 만들어 놨어?"

울면서 큰아이가 전화했다. 토요일은 늘 그렇듯 수학학원 다녀와서 라면을 끓여 먹고 게임을 한다. 어울릴 친구가 없고, 3시간 30분의 수학수업도 듣고 왔으니 좋아하는 게임 2시간을 하기로 나와 약속했었다. 아이가 시간을 통제하고 상의하는 사람은 나뿐이니  약속은 우리 둘이 한 셈이다.

넌 엄마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냐며 소리를 질러댔다고 한다. 아들은 고분이 아빠의 호통을 듣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아빠는 뭘 잘했냐고 대들었을 테다. 둘의 소리지름은 남편의 ' 너 나가!'로 마무리 됐을 거다.

신발은 챙겨 신고 집 밖에 나온 걸까? 영하의 날씨에 잠바는 입고 나와 내게 전화를 하는 건지 아이 걱정부터 되었다.


매출이 떨어져도 이렇게 떨어질까 싶다. 꽁꽁 얼어붙은 소비심리라고 연일 매경이 위로해 준다. 디저트카페 사장들의 온라인카페 모임에도 다들 힘들다는 소리가 가득하다. 어쩜 이렇게 결을 함께하는 건지 신기하다.

12월의 마지막 주말 남편에게 여왕의 오후를 그만 나가라는 말을 들은 그날의 기운을 여왕의 오후가 제대로 흡수한 듯하다. 광교까지 어찌 전달된 건지 신통할 따름이다.


"기운이 안 좋나?"

고무나무 잎을 잘라내고 있으니 파티시에가 지나가며 툭 던진다. 개업축하로 지인이 선물해 준 고무나무는 줄기를 자르면 고무가 나올 듯 튼실했었다. 처음 만났을 때 반지르르 기름칠한 듯한 잎이 무성하던 나무는 날이 추워지면서부터 잎에 누런 반점이 번졌다. 추웠나 싶어 그냥 뒀더니, 그 옆 다른 개업 기념 나무들의 잎들도 똑같은 형태로 잎들이 쳐지기 시작했다. 

가위로 쳐진 잎들을 쳐내니 앙상해진다. 앙상한 가지 끝에 삐죽이 초록이 보인다. 아직은 잎이라 부를 수 없지만 장차 잎이 될 예정인 것이 틀림없다. 초록은 하나가 아니다. 잎을 쳐낸 가지 끝 돌돌 말린 잎눈이 여기저기다. 지금은 기름한 줄기가 볼썽사납지만, 여왕의 오후에 약간의 해만 더 드리우면 헤치고 나올 잎눈들이 여럿인 나무는 아직 죽지 않았다. 얼마 남지 않은 잎과 새파란 잎눈을 마른행주로 닦는다. 봄이 오고 있고, 시간은 흘러가고 있다. 

나무는 아는데 나는 모르는구나. 아이의 우울증을 차차 나아지고, 겨울방학은 끝나간다. 계속하기만 하면야 언젠가는 고객도 줄 서서 여왕의 오후를 사갈 날도 올 테다. 남편도 마음을 알아줄 날이 오겠지? 내가 살아야, 내가 이렇게 오며 가며 달리는 신분당선 속에서 삶을 기록하며 나아야만 한다는 것을 그도 응원해 줄 날이 왔으면 좋겠다. 봄이 오듯, 잎눈이 솟듯 그에게도 우리에 대한 믿음이 찾아올 날이 어서 오길 빌어본다. 




대문사진 사진: UnsplashScott We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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