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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모총회는 즐거워

by 호박씨



"한국 교육 자체의 구조적인 문제에 아이가 괴로워하네요."

공감의 힘은 얼마나 대단한가. 아이에게 잔인한 시간이라는 말에 자꾸 눈물이 난다. 울보로 유명했던 어린 시절의 내가 소환되었다. 마스크를 쓸 수 있는 것은 이런 타이밍엔 축복에 가깝다.

중3 새 학기가 시작되고 상담신청 시간표에 첫 상담으로 신청을 해두었다. 주어진 시간은 30분이다.

" 다음 상담이 있어서 이야기 나눌 시간이 다 되었네요. 혹시, 학부모 총회 때 오실 수 있나요?"

좀 더 맞장구치고 싶고 아이의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시간제한이 있다.




국제학교의 상담기간은 2~3일이 걸린다. 상담기간에는 수업이 없어 오롯이 선생도 학생도 학부모도 관계를 이어나가는 데에 집중할 수 있다.

하나 한 학생당 30분의 시간이 주어지고 슬롯이 연이어 지기에 할 말이 많은 학부모라면 특히 원어민이 아니어서 언어로 표현해 내기에 자유롭지 않다면 시간에 쫓기는 기분이다. 사회성 좋고 순응적인 아이라면 담임 얼굴 보며 올해는 더 나은 입지를 학교에서 찾겠거니 하면 그만이겠다.

통역이 필요한 학부모의 경우, 일단 통역 담당자와의 시간을 맞춰야 한다. 통역분의 입을 통해서 담아낼 수 있는 내용도 고민일 테다.

영어 말하기보다는 읽고 쓰는 것이 편한 나로서는 통역이 필요한 건은 아니지만 상담은 어려웠다. 말실수해서 아이에게 영향이 가면 어쩌나 하는 망상으로부터 시작해서 단어선택이 오해를 가져오면 어쩌나 하는 걱정까지 상담 주간이 가까워오면 전전긍긍했다.


학부모 총회에 샤넬백 없어서 가기 민망하다는 조선일보 기사를 읽었다. 한국 엄마들 중에 그런 이들도 많을 테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도 많을 터인데 누가 보면 한국의 엄마들은 다들 샤넬팬인 줄 알겠다. 누가 쓴 기사인지 그렇게 쓸 거리가 없는 기자님이 요샌 많으신가 보다 했다.

국제학교 상담기간도 핸드백 전시장이긴 마찬가지다. 청바지에 경량잠바차림으로 남편과 함께 오는 미국엄마가 세상 부러웠다. 두 번째 상담부터는 편안하게 느끼는 옷으로 차려입고 갔다. 하고 싶은 말,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와 아이에 대한 부탁까지 오롯이 전달할 수 있는 그런 분위기를 만들려면 피부에 닿이는 옷도 중요하다. 어디 긁힐까, 쓸릴까 걱정스러운 몇 백만 원짜리 빈 핸드백 들고 가느니 손때 묻혀 잘 다스려둔 가방이 편했다. 국제 학교는 사립학교다 보니 찬조금에 대한 제한이 없다시피 하다. 기부는 늘 독려되는 일이다. 학교에 돈과 거금에 상당하는 물건을 들고 오는 것을 학교는 기꺼이 찬성하는 바이다. 그러니 영어 못하는 아이에 대한 배려를 당부하는 마음을 담아, 한국적인 머그컵이나 술을 들고 가곤 했는데 핸드폰 들어가면 꽉 차는 명품백보다는 내 손에 부드러워질 데로 부드러워진 가방이 기념품을 넣어가기엔 쓸모 있었다.



"어머니, 출근하셔서 학부모 총회 못 오시죠?"

" 아뇨, 꼭 가겠습니다. 그때 꼭 뵐게요."

신나게 답했다. 학부모 총회가 뭘 입고 가야 하나, 뭘 들고 가야 하나 고민할 겨를 따윈 없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그 어떤 동아줄이라도 잡는 심정으로 아들의 문제에 관심을 가져주는 이에게 매달리고 싶다. 내가 옳은지 의문스럽고, 아들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까 자신 없지만 그 무엇보다 도움 청할 이가 없어 외롭다. 괴로움을 공감하고 귀 기울여주는 이를 만난 30분이 내겐 너무 귀해서 총회의 T.O.P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국제 학교 상담이 사실은 껌이었구나. 이제야 깨닫는다. 남의 나라보다 내 나라가 어렵고, 남의 자식보다 내 자식이 어려운 법이다. 통하지 않는 말을 고민하는 때가 더 나았었나보다. 말이 통하는데 메시지가 전달되지 않고, 의사소통이 되는데 뜻하는 바를 이룰 수 없는 것이 훨씬 가혹하다는 것을 오늘에서야 알게 되었다. 부모 됨이란, 사람이 되어가는 것인가 보다. 아들을 통해 생을 제대로 까발리고 있는 중이다.

늘 학교에서 만나는 이에 대해 반감을 갖던 아들이 지난주 밝은 얼굴로 영어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를 해줬다.

지금 너희가 받고 있는 영어 교육은 사실 시대에 뒤떨어진 교육이란다라고 말해주는 영어 선생님덕에 아들은 기분이 붕붕 떠있었다. 외로움이 가신 아이의 얼굴에 뵙지 못한 영어선생님에 대한 고마움이 마음 가득했다.

에피소드를 상담하며 이야기드리니, 담임 선생님이 그게 저예요 하신다.

실타래처럼 엉킨 아들과 나의 한국 공교육 적응에 실마리가 생기는 걸까? 괜스레 느낌이 좋다. 누구에게 조언을 구해야 하며, 어디에서 도움을 얻어야 할지 막막하기만 길에 한 줄기 빛이 스미는 듯하다. 중학교 학부모 총회를 가는 엄마들 중에서 가장 기꺼이 가는 이는 누가 뭐래도 호박씨일 것이다.


대문 그림 <미하일 쿠가츠> 먼 길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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