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즈 총리가 사임했다. 최장수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이름과 같은 이름을 가진 그녀는 최단기간의 총리라는 불명예를 끌어안게 되었다.
리즈, 엘리자베스 테일러도 리즈고 퀸 엘리자베스도 리즈다. 성경에 나오는 이름이 대부분인 영어 이름에서 애칭으로 이름에 변주를 주는 것은 흔한 일이다. 82년생 김지영의 지영이 거기다 성까지 김 씨인 김지영이 수두룩 하듯, 수많은 리즈가 영어 문화권에 존재한다.
Kavita의 딸도 리즈였다. 카비타는 인도계 이름에선 흔한 이름. 그녀의 이름은 전형적인 인도인이다. 그녀가 받은 이름은 인도스럽기 그지없었지만, 그녀는 딸에게 인도와는 정반대편의 이름을 준다. 엘리자베스 라 지어주었기 때문이다. 애칭은 리지였다. 사랑스럽고 발음하기 쉬운 이름이다. 카비타의 아들, 리지의 오빠는 윌리엄이다. 이 또한 영국 왕의 이름으로, 현 영국 왕세자의 이름이기도 하다. 흔하디 흔한 영국인 남자아이의 이름을 아들에게 주고, 리암이라 불렀다. 쉰들러 리스트로 유명한 리암 닐슨의 리암은 윌리암을 줄여 부르는 말이다.
카비타의 눈빛이 좋다. 맑고 유머와 여유가 넘친다. 카비타가 밝히지 않았다면 그녀도 그녀의 남편처럼 캠브리지 의대를 졸업한 닥터라는 사실은 짐작하기 힘들었다. 막연히 캠브리지를 나온 의사는 나와는 말도 안 섞지 않겠나 싶었으니까.
카비타는 영국인과도, 인도인과도 어울려 뭉쳐 다니지 않았다. 홀로 다녔고 씩씩했으며, 혼자 있는 그녀에게서 외로움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에게 주어진 올곧이 아이들을 돌볼 시간에 충실했고 부모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요구하는 국제학교 자원봉사에 열심히 였다. 바빴고 에너지 넘쳤다.
카비타의 딸과 플레이 데이트를 하게 되기까지는 시간이 많이 걸렸다. 카비타에게 반한 것은 나였지, 딸은 아녔으니까. 리지는 낯을 가렸고 딸은 성급했다. 국제학교 유치원에서부터 몇 안 되는 한국인이었던 딸은 한국에서 이제 막 오는 여자애들의 새침한 또래문화에 끼지 못해, 동성친구라면 물불을 안 가렸다. 반면 리지는 영어에 능해, 낯선 독일과 국제학교에 적응하기 위해 뭐든 조심스러워했다. 아마 그것은 카비타와 다르게 피부색이 유난히 어두운 리지가 영국에서 겪었었던 일들에 영향도 있지 않을까 추측해본다.
어렵게 성사시킨 플레이 데이트였다. 딸을 설득하고, 조심스러운 리지의 컨디션을 맞추고,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바를 카비타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서 노력했다. 아들이 딸의 플레이 데이트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는 아들의 놀이시간도 함께 맞춰둬야 한다. 머지않은 곳에 사는 한국인 친구를 불렀다. 초대한 것은 L 이였지만, L의 엄마는 아이들의 플레이 데이트 시간에 맞춰 오더니 차 한찬 마시고 가라는 나의 예의 섞인 인사를 거절하지 않고 들어왔다. 그냥 한 소리인데.... 아이 둘의 동시 플레이 데이트는 사실 꿀 같은 휴식 시간이다. 하고 싶은 것은 뭐든 할 수 있다. 혼자 있고 싶은데 그녀는 내 눈치를 살피지 않는다.
식탁에서 커피를 홀짝이던 그녀가 딸의 방에서 딸과 함께 거실로 나온 리지를 보더니 빤히 쳐다봤다.
"오늘 둘째도 플레이 데이트구나. 저 친구는 어디 사람이에요?"
"아, 인도인인데, 영국에서 태어났어요."
" 이름이 뭐예요?"
" 엘리자베스요. "
" 푸핫."
마시던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그녀가 냉소를 뿜는다.
엘리자베스라는 이름에는 금발이 어울린다고 했다.
리지는, 엘리자베스는 흑단 같이 검은 머리에 동짓날 밤처럼 캄캄한 눈동자를 가지고 있다.
검은 진주 같은 리지에게 엘리자베스라는 이름은 걸맞지 않는다고 그녀가 대수롭지 않게 말한다.
우리는 얼마나 더 지나야 인터내셔널 한 사람이 될까?
그녀도 나도 국제학교, International School을 경험한 지 3년 차였다. 그렇고 보니 그녀가 유색인종과 이야기하는 것은, 물론 한국인은 제외하고,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얼마 전 전학 간 그녀의 절친은 영국인. 요새 그녀의 아들이 한창 친한 아이는 독일인이다.
그녀는 언제쯤 되면 국제적인 인간이 될 수 있을까? 그녀도 나도 유색인종이니 우리부터 먼저 눈에 씌워진 화이트 렌즈부터 빼야 하는 것은 아닐는지 싶다.
리지, 리즈, 엘리자베스 그 무엇이면 어떠할까 싶다. 내게 그리고 내 딸에게 엘리자베스는 밤바다다. 결국 딸과 절친이 되었고 떠나는 날 눈시울을 밝히던 카비타가 그리워진다. 사임 인터뷰를 하는 리즈 트러스 총리의 금발과 날카로운 눈매를 보며 우린 밤바다를 떠올린다. 카비타와 리지를 만나고 싶은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