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얕은 어린이 수영장에서 시작하는 독일의 6월을 자랑한다

by 호박씨

6월 셋째 주면 국제학교 여름방학이 시작이다. 독일 현지 학교는 그보다 2주 정도 늦게 방학 스케줄을 잡는다. 국제학교 방학이 두 달이나 된다는 사실만으로도 공포스러운데 독일 현지 학교 방학이 2주 늦다는 사실은 더 공포스럽다. 국제학교의 summer camp는 더위가 한창인 7월 중순이나 돼야 시작한다. 개학이 다 되어 갈 무렵에 여름 캠프는 갈무리가 되고, 여름캠프는 미리 학교를 둘러보고 체험해 보는 코스로 이용되기도 한다. 독일 현지 학교 스케줄이 7월 초반에 방학을 잡는다면, 프랑크푸르트를 포함한 헤센 주의 모든 시설들 또한 이와 같은 계획으로 짜인다. 시립, 구립 체육관에서 운영하는 싸고 저렴하고, 검소한 활동의 여름 캠프 또한 오픈하려면 아이들 학교가 방학을 시작하고도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는 뜻.

해본 적 없는 일에 뛰어듬을 하고 싶은 한국부모가 몇이나 될까? 그러니 호박씨만 소심하다고 하시기 않길. 낯선 환경에서 아이들과 방학이라는 시간, 온전한 하루라는 자유시간 앞에서 무기력해지는 게 사실이었다. 남편에게 이런 마음을 싫었고, 무기력함을 다른 누군가와도 공유하고 싶지 않았다. 지는 것만 같았다. 내게 주어진 임무 앞에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약해빠진 짓거리겠니.


우리가 오버오젤시에 도착했던 그해 초봄 즈음에 리모델링을 한 시립 수영장장이 없었다면, 난 방학이라는 두 글자 앞에서 백기를 흔들었을 테다. 독일학교의 방학과 오버오젤 지역의 휴가가 2주나 남았으니 야외 수영장은 우리의 것이다. 독일의 수영장 물은 냉탕이라, 온기라곤 찾아볼 수 없기에 20도의 서걱하게 시원한 초여름 야외 수영장 개장은 그림의 떡이다. 독일선 온천이 아니고서야 찬물에서 수영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아는 아이들은 야외 수영장 가로 펼쳐진 숲놀이터나 조그맣게 마련된 유아 물놀이터에서 놀기 시작한다. 그럼 이제 한숨 자면 된다. 얘들이 혹여 수영장 물에 빠질까 걱정 없고, 낮잠을 방해할 더위는 전무하다.

그렇게 오전 나절을 보내고, 3유로 한화로 5천 원 정도 하는 브로첸에 끼운 소고기 소시지 하나 사서 점심도 해결한다. 늘 우리 아이들만 데리고 다니고, 혼자 시간을 보내곤 했는데 외롭단 생각보단 가볍단 느낌이었다.

무서워 벌벌 떨며 시작한 하루였다. 이 하루를 그럴싸하게 보낸 성과를 내야 하는데 나 혼자선 자신이 없네 싶었지만, 이만하면 오후를 맞이하는 상태치고는 꽤나 괜찮다. 뿌듯하다.

때 마침 그녀를 마주쳤다. 오버오젤 시 산하의 독일어학원 코스를 함께 듣는 그녀는 남편과 함께 독일로 이민 왔다. 그녀의 두 아이들은 독일 현지 학교를 다니고 있었고, 씩씩한 그녀는 가족을 위해 부지런히 독일어를 배웠다.

" 저희는 수영장 갔다 와요."

아직 방학을 하지 않은 독일 학교다. 독일 공립학교는 새벽에 뜨자마자 중천을 향하는 독일 해에 맞춰 일치감치 등교하고 점심을 제공하지 않고 1시면 하교시킨다. 아이들을 데리러 일본 중소형 브랜드의 밴을 몰고 나가는 K가 운전석에서 보였다. 마침 걸린 신호에 그녀, K와 눈이 마주쳤다. 내가 몰고 있는 차는 남편이 골라준 아우디. 아우디 중에서도 초소형 모델이라 한국엔 수입도 되지 않는 모델이지만, 그녀의 밴 앞에서 목에 힘이 들어간다. 급식을 제공하지 않는 독일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을 부랴부랴 데리러 가는 그녀에게 묻지도 않은 나의 일상을 알린다. 궁금하지도 않은 우리 얘들의 방학을, 호젓해서 천국 같았던 오전을 자랑하고 싶다. 내가 해냈다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해서 아쉬웠는데 아는 얼굴을 보니 뽐낼 수 있어서 어찌나 다행인지.

" 저흰 지난주부터 방학이에요, 호호호."

나란 인간은 이렇게 얕아 아이들이 제 것인 양 즐기고 나온 유아 물놀이장의 찰랑 거리는 물 높이만도 못하다. 내 깊이는 고작 그 정도인 게다.






주재원 카페를 운영하고, 오픈챗방에 카페 회원들이 모여 한국 들어온 지 얼마나 되었는지와 아이들 영어 공부 걱정, 한국 적응 문제들을 나누기 시작했다. 조언을 제공해 줌으로써 해결사가 되는 멋있는 나로, 쓰임이 충만한 인간으로 거듭날 수 있는 기회다. 의도한 바다.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하고 시작을 지나가고 있는 이들에게 순수한 목적으로 도움을 준다면 내 문제 또한 해결되는 혜안을 얻게 될지도 모른다는 희망도 담았다.

" 한국 학교 걱정돼서 못 보내겠더라고요. 외국인 학교 넣었는데 만족해요. 저도 좋고요. 얘도 공부 안 해서 행복하게 다녀요."

신입 엄마가 카톡방에 들어오고 서너 번의 카톡에 이르러선 염장을 지른다. 그녀가 올린 톡을 한참을 쳐다봤다. 영어학원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독서지도는요, 귀국자반 시스템은 이렇게 돼요 라며 신바람 나게 지나간 시간들을 풀어내기에 바빠 독수리타법을 탈피할 수 있을 만큼 나의 톡은 진화하기에 이르렀다. 그랬던 손가락은 '외국인학교'와' 행복'이란 단어 앞에 한 자도 나아가지 못한다. 태클을 걸까? 비겁하게 한국 와서도 외국인 학교 보낸 그녀에게 뒷감당은 언제 할 것이며, 한국 적응은 언제까지 미룰 수 있을 것 같냐며 깽판을 놓아볼까 싶다. 그렇게 스크린을 내내 들여다보았다. 챗방에 나 외에 있는 10여 명이 지혜롭게 그녀에게 답해주길 빌었다. 소리 없이 흐르는 그녀의 철딱서니 없음에 대한 질타를 부드럽게 넘겨줄 은혜로운 자가 나타나란 말이다, 부디.

그러나 카톡방은 정적만 흐른다. 아.... 은혜로운 자는 나여야 하는 것만 같다. 2015년의 초여름, 행복이란 단어를 붙일 만큼 예쁘장한 날씨와 여유러움이 넘치던 수영장의 여름을 누렸던 나이기에, 카톡 총대는 내가 을러메야 한다. 수영장 앞에서 자랑을 하고야 말았던 얕디 얕은 인간이 나였으니 오늘 침착하게 한 글자 한 글자 써 내려간다.

" 님의 아이가 행복하다니, 다행입니다."

외국인 학교 학비와 영미권 대학으로의 진학, 그리고 한 명이 아닌 둘인 아이들이라는 상황 앞에서 부지런히 계산기를 두드렸다. 투자비용, 미래 가치 이런 용어들을 알지 못한다 해도 부모 된 자라면 누구나 좌절하는 국면에 머릿속으로 굴리게 되는 청구서다. 부적응의 리스크와 맞바꾸고 싶지 않지만, 괜찮을 거라면 다독이고 안 괜찮으면 어쩌나 염려하고 눈물짓고 있는 오늘의 내게 '다행'이란 말은 쥐어짜야만 가능한 단어다.

오늘 덕 하나를 쌓고, 과거의 어리석음에 용서를 빈다. 독일에 여적 있을지, 방학이라 한국을 들렀을지, 또는 영영 한국으로 돌아왔을지 알 수 없는 K가 세상 어딘가에서 듣고 있을 용서를 구한다.

그리하여 주재원 카페를 맴도는 주재원 와이프들의 불안함을 끌어안아본다. 발목도 채 안 오는 유아수영장 물도 물이니까. 얕아 빠진 내 인격에도 불구하고, 난 무사히 한국을 살아가고 있으니 자꾸자꾸 부둥켜안으며 넉넉한 품을 가진 나로 새로 태어나고 싶다. 매일 조금씩 더 넉넉해지고 싶다.


대문그림 : Children Swimming 작자미상, SA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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