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엄마, 치킨!"
딸아이가 신나게 외친다. 치킨이 아니라 치킨 할머니라도 사줘야 할 판인데, 아이는 치킨으로 행복할 예정이다.
"와, 내가 100점이라니."
혼자 자꾸자꾸 되뇐다. 그렇게 아이는 자신에게 상을 주고 있다.
"이것도 못 풀어!"
손에 잡히는 것이 지우개였다. 지우개 임금님이라 불러도 족할 30cm쯤 되는 이태리의 한 기념품 가게에서 산 연필모양 지우개다. 누런 몸통은 나무색인 척하고 있는 조악함을 띠고 있지만, 유럽에서 한국 어린이를 만족시킬 만한 기념품이 있다면 사야 한다. 비록 Made in China일지언정, 머무는 순간의 기쁨과 기억을 담아내기 때문이다. 뙤약볕에 걷느라, 더운 날씨에 순식간에 녹아내리는 젤라토뿐이라 이태리는 유쾌할 것이 없었다. 장소를 옮길 때마다 기념품을 쥐였다. 호텔방에 돌아가면 그것들을 자신의 작은 트렁크에 정리하게 시키며, 오늘을 잊지 않길 그리고 이곳을 기억하길 빌었다.
그 지우개를 아이 이마를 향해 던지니 고무인데도 길이가 제법 돼 절반으로 부러져있다. 괴로움이 서린 아이의 얼굴을 보니 마음이 따끔하다. 분수는 해도 해도 친해지질 않고, 낯설어 무섭기만 한데 엄마란 사람의 인내심은 평생 아이가 뒤쳐지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에 휘둘려 아이 마음은 몰라준다. 오히려 소리 지르고, 울부짖는다. 본인이 제일 힘들 것인데, 마치 내가 더 힘들다고 생색내는 꼴이다.
1부터 10까지 수를 놓고 1년을 배웠다. 2+1=3을 반아이들이 다 이해할 때까지 충분히 이야기를 나누는 교실이었다. 두 자릿수로 넘어가면 제안을 한다. 12+9=21을 가장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설명해 내는 아이가 가장 뛰어나다. 잠자리 들기 전 딸아이에게도 큰 아이에게 시켰던 것과 같이 한국에서 가져간 기본 연산 문제집을 챙겨 시켰지만, 아이는 흥미 없어했다. 계산기로 하면 될 것을 왜 반복해서 해야 하며, 시간이 정해진 것은 아이가 더 긴장해서 실력 발휘를 못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딸은 감정 파다. 아이에게 삶은 기쁨과 슬픔이 총 천연색이다. 반면 큰 아이는 딸에 비하면 무채색이다. 변화는 피해야 할 대상이다. 반대로 딸에겐 지루함이 제거 1순위이며, 애정과 관심은 늘 과정 안에 가득해야 한다. 그러니 잘 풀리지 않는 아이를 앉혀 두고, 얼른 풀고 잤으면 싶은 마음에 문제와 아이 손을 째려보고 있는 엄마가 계산 실수를 부추기고 있었다.
사칙연산을 때때로 실수하는 아이를 학원에 보내는 것이 망설여졌다. 교육특구의 지역이라 학원 수준이 높을지 모르겠다고 지레 겁도 먹었다. 괜히 여러 애들 있는 곳에 보냈다가 아이가 나한테 받은 상처보다 더 큰 상처를 입으면 어쩌나 했다. 그리하여, 딸과 나는 초등 3년을 수학을 집에서 함께 해나갔다. 독일에서 그렇했듯이 딸의 수준에 맞는 문제집이라면 학년에 상관없이 선택하여 앉아있을 수 있는 적정량을 정해 규칙적으로 매일 했다.
비대면 교육이고, 선행을 한 반친구들로 가득해서 학교 수업시간은 딸에게 외로움이 더해졌다. 수학 수업이 끝나고 나면, 수업 시간에 나만 이해를 못 한 거 같다며 눈물지었고 괜찮다며 함께 수학 교과서를 펼쳤다. 선행으로 고등학교 과정도 나간다는 토끼들과 한 반인 거북이가 나만 왜 거북이냐고 자괴감에 빠지질 않을 테다. 거북이는 거북이의 속도가 있고 토끼는 토끼의 속도가 있는 법이다. 말이야 지금에서 이렇게 하지만, 단원 평가날마다 자존감을 내팽개치는 아이를 일으켜 세우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리고 나도 외롭고 무서웠다. 내내 한국에서 거북이로 살면 어쩌나?
중학생이 되면 과외를 하면 어떻겠냐고 1년여쯤 전부터 일러두었다. 아이는 6학년 학기 초 친구들 중 수학 제일 잘하는 아이들이 다닌다는 학원들을 여럿 알아봐 오더니 보내달라고 졸라댔었다. 차마 학원 갈 만큼 연산이 안정적이지 못하고 말할 수가 없었다. 6학년인데 사칙연산이 흔들린다는 말은 엄마이지만 선생이기도 한 내가 딸에게 하기 힘들다. 중학생이 되면 수학 내용이 어려우니 엄마가 알려주긴 힘들 거야라며 달랬다. 엄마는 초등과정까지 밖에 잘 모른다고 거짓말을 하고, 도와줄 수 있을 동안에는 돕고 싶다고 딸에게 호소했다. 정 많은 딸은 엄마에게 미션을 주는 셈 치고 1년을 더 함께 해주었다.
과외 선생님과 수업을 한지 만 3달이 되었다. 진단 평가 100점은 과외선생님께 가장 먼저 전화를 해야겠다고 신나 한다. 이런..... 엄마 덕이야는 찾기 힘들고 엄마는 치킨 배달비를 내야 한다. 축하해, 딸. 온전히 네가 일궈낸 결과야. 다 너의 것이라 하고 싶다. 앞으로 한국에서든, 유럽에서든 그 어디에서든 펼쳐질 네 삶에 진단평가가 치러진다면 노력은 베어나고 시간은 정직할 것이라고 점수가 말한다. 나 대신 점수가 말해주니 그것으로 되었다.
" 엄마, 앞에 앉은 얘는 90점이더라고. "
그 사이 다른 아이 점수까지 볼 여유까지 생겼다. 치킨 뜯으며 이 순간을 마음껏 즐기고 잊지 말길.
지우개는 부러졌지만, 반토막 난 상태로 2개가 되어 아직도 잘 쓰고 있다. 여전히 괜찮다. 물론 부러지고 괜찮지 않은 날도 올 테지만,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다. 거북이에겐 거북이만의 속도가 있고 목표점이 있으니까 말이다. 언젠가는 가 닿을 것이다. 그러니 No worry, Eat Chicken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