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호박씨 Apr 08. 2023

강남 아줌마는 세비야에서 크리스마스를 맞는다.

스페인 세비야 올드타운에 온 듯했다. 낡은 건물마다 아기 예수의 별이 떴다. 둥근 별, 뾰족한 별, 저마다 다른 모양의 축복걸려있어 낡은 스페인거리의 크리스마스는 우주 한복판 같다. 아기 예수가 탄생하지 않았다면 어쩔 뻔했는가? 유럽의 크리스마스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빌려 현생의 산 자들이 즐기려는 의도가 뻔히 베어난다.

"우와, 저기가 우리 집인가?"

S 아파트의 문주 가득한 조명 때문에 반대편은 암흑이다. 독일서 온라인으로 매물과 평면도를 보고 친정엄마에게 대신 계약을 부탁드렸던 전셋집은 암흑 속 H 아파트다. 1999년에 지어진 아파트에는 문주가 없다. 독일서 살던 집처럼 작은 현관문이 있고, 독일에선 인건비가 비싸 볼 수 없는 경비실이 있다. 경비 아저씨는 한가롭게 TV를 보고 계신다. 경사로 아래쪽 대로에서 S 아파트를 보고 탄성을 지르던 아이들이 조용해졌다.

호텔 리조트 저리 가라 싶은 문주를 갖춘 반포의 신축 아파트에서 횡단보도 하나 건너  200미터의 오르막을 오르면 우리 집이 나온다. 온 유럽을 여행 다니면서도 졸지 않았는데, 세비야의 별우주 아래서도 마냥 즐기기만 했던 호박씨다. 자꾸 작아지니 기분 나쁘다. 할 수 있다면 문주에 스크래치라도 내고 다. 전세 보증금 1억이 모자라 구닥다리 현관을 가진 아파트 현관을 지나가야 하다니 말이다.  5년이나 독일에서 국위 선양하며 얘들 키워낸 주재원 와이프인데! 남의 나라에서 잘 지낸 요령으로 그럴듯한데 취업하여 1억 모아 이사하리 마음먹었었다. 문주 때문에, 크리스마스 조명 때문에 이를 꽉 물었다.



3년 만이다. 독일서 사온 방수 잠바에 성장기 아이들이 신다 작아진 운동화를 신고 경사로를 따라 내려온다. 영어유치원 셔틀버스를 기다리는 꼬마들이 문주 앞 학원 셔틀 전용 정거장에 대기 중이다. 아이들은 우산이 필요 없다. 물론 방수 잠바 덕에 내게도 우산은 필요 없지.

아파트 내의 산책로로 향한다. 주민용 티 하우스 앞 테라스는 내리는 비에 텅 비어있다. 테라스 건물 벽의 미로의 그림 제목은 산책이다. 원화의 느낌을 그대로 살려 이미테이션의 조악함은 없다. 연인의 손을 잡은 여인이 희열로 하늘로 날아갈 듯하다. 눈이 즐거우니, 발이 가볍다.

 코인 투자에 성공해서 1억이 생긴다면 어떨까? 손만 까닥했을 뿐인데 통장에 1억이 꽂히는 게다. 코인 성투 1억을 보태 S 아파트로 전셋집을 옮기고 티 하우스 테라스에 앉아 커피를 주문한다. 우산 없이 셔틀을 타고 국제학교로 가는 아이들을 배웅하고 나서 말이다. 그랬다면, 이 글을 세상밖으로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오늘도 괜찮다. 세비야 리조트보다 으리으리한 문주를 가진 아파트에 살지 않아도 행복한 순간들이 찾아오곤 한다. 뭔가 단단한 것이 내 안에서 자라난다. 독박 육아로, 결혼생활로 사리 여럿 생긴다고 투덜거리던 응어리와는 다르다. 먹고 싶지도 자고 싶지도 않게 만들던 내 속의 뜨겁고 물컹한 화병이 아니다. 둘러싼 세상의 속도에 멀미가 나 딱딱하게 뭉치던 어깨 위에 놓인 공황장애도 아니다.




 국제학교에는 다양한 학부모들이 존재한다. 국적도 인종도 부의 수준도 다양하다. 인근 지역에서 모이는 한국의 공립학교 시스템에서는 마주할 수 없는 경험이다. 다시 태어나야 달성할 수 있는 수준의 부와 명예를 가진 이들이 있다. 독일은 귀족은 더 이상 존재하질 않으니 (영국은 여전히 귀족이 존재한다.), 독일 국제학교에서 만나는 '높은' 신분은 오너 패밀리 또는 고액연봉자다.

 당시 그들의 아이들과 Playdate를 잡을 당시 내겐 불안증도 공황장애도 없었다. 다시 태어나야 그들과 같은 신분이 될 것이라 여겼다. 평등해질 이유도 없었다. 어차피 그들은 나와는 다르다. 언제 그들을 만나겠는가 했다. 우물 안 개구리처럼 나와 같은 검은 머리를 한 이들을 바라본다. 시작점부터 다른데, 해 줄 수 있는 것이 같지 않으니 내 아이는 영원히 S 아파트의 문주만 바라보며 살거나, S 아파트 문주 옆 경비초소에서 학원버스 셔틀 정거장의 안전을 지키는 노동자로 살아갈 예정이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의 끝에 다다른 곳은 끝이 없는 검정, 불안이었다. 왜 얘는 둘씩이나 낳았는가, 무책임하게?

 "파이팅 해야지 말고, 행복해야지를 불렀으면 좋겠어."

S아파트에 사는 딸아이 친구가 저녁나절 우리 집에 와서 딸과 숙제를 준비하며 인스타에서 한창 인기 있는 노래를 부른다. 파이팅 해야지 말고 행복해야지를 노래해야 한다고 딸이 친구에게 말하는 것을 엿듣고 있는 중이다. 파이팅은 그만하고 지금 이 순간 행복하라며 아기 천사 같은 얼굴로 아이가 말한다. 불안할 것 없다. 시기와 질투로 가득한 지옥을 품었던 적도 있지만, 그들을 키우며 순간순간 웃고 재잘거리며 천국을 함께 했던 시간들도 많다. S아파트의 크리스마스 장식 보다 더 아름다운 진심을 나누고, 사랑을 퍼붓고 있다. 이것이면 충분하다. 그러니 코인1억을 번다면 전세금엔 보태지 말고 재투자 해야지.

 어둠이 내리면 세비야의 거리엔 하나둘씩 조명이 들어온다. 먼저 밝아 오는 별도 있고, 한밤중 올드타운에 관광객들이 북적여도 여전히 불 켜지지 않은 고장 난 별도 있다. 속담엔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 했고, 기원전의 출애굽기엔 네 이웃의 집을 탐하 지 말라 쓰여있다. 아기 예수는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 네 이웃을 시기와 질투하면 넌 지옥을 사는 것이라고 말이다. 내 별은 이제야 서서히  밝아오고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