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보다 조용하다. 12살과 13살, 초등학생과 중학생의 차이는 이리도 큰가 보다. 딸의 생일이었던 작년 11월 파자마 파티에서는 집이 부서져라 텐션이 들끓었던 아이들은 이제 20대처럼 앉아 연신 먹고 수다를 떤다. 우리 집에서 벌써 파자마 파티만 세 번째다.
다른 얘들 엄마들마다 어떻게 집을 비워줄 생각을 했냐고, 감사하다들 한다. 첫 파자마 파티 때는 아들과 지하철 30분 거리의 친정으로 가고 얘들에게 집을 통째 넘겨주었다. 아들은 대 흥분을 했다.
"남자라고 해서 나를 나쁜 놈으로 취급하는 건 말이 안 되지!"
지극히 맞는 말이었지만, 파자마 파티가 허락이 되려면 아들이 집에 없어야 한단다. 남편만 출장으로 집을 비우면 되는 줄 알았더니 아들도 안된단다.
마음을 이해하지 못할 바도 아니였다. 남의 집에서 자는 것도 낯설고, 슬립 오버 초대도 처음인 애들이 대부분이였고, 파자마 파티가 조심스러울 수도 있겠다.
국제학교의 교우관계 최고봉은 파자마 파티다. 물론, 성별차는 외국도 존재한다.
남자애들은 1학년도 슬립오버, 친구집에서 자고 오는 일이 흔했는데, 여자친구들은 조금 더 꺼리는 분위기였다. 딸의 친구들은 한국애들이 많은 편이었는데 한국 부모들은 슬립오버, 친구집에서 자고 오는 문화를 낯설어했다. 아들의 친구들은 형이 있는 아시안들이 대부분이라 일찌감치 이 집 저 집 번갈아 다니면서 신나게 딴 집 자기를 즐기는데, 딸은 초대를 해도 응하는 친구가 드물었다.
문제는 딸도 다른 집에서 자기 어려워했다.
7살이 넘어서도 밤이 되면 불안감이 높아지고, 쉬이 잠들기 어려워서 한참을 딸과 함께 잤다. 아직도 딸은 종종 혼자 자는 내 옆에 와 눕는다. 다른 집에 가서 자긴 힘들고, 슬립오버는 하고 싶으니 초대를 하면 딸 가진 부모들, 특히 한국 부모들은 망설이기 일쑤였다.
외국 주택의 구조는 1층 거실, 2층 부모 공간, 3층은 아이들의 침실이다. 살림이 넉넉하다면 손님 방도 한 개쯤 존재한다. 1층 거실 밖 잔디 깔린 정원에서 놀다가, 3층의 침실 또는 손님방에서 두런두런 밤새 이야기를 나눈다. 손님방이 없거나 3층 아이방이 좁다면 슬리핑백이 있다. 파자마 파티엔 슬리핑 백과 개인 베개, 잠옷이 필수다. 야식 문화가 없으니 빵, 과자, 과일, 음료수를 아이들 방에 넣어주면 그만이다.
자고 난 아침에는 시리얼, 우유, 토스트, 과일을 준비해 두면 애들이 알아서 먹는다. 전날 저녁도 피자 픽업해다 주면 제일 좋아한다. 단, 피자는 개인 취향을 살려서 주문해줘야 하겠다.
이런 문화는 아파트가 아니라 주택이기 때문에 즐길 수 있다. 침구는 안 빠는 게 원칙이다 시피하니 개인 침구는 들고 다님직 하다. 밥과 국물, 야식처럼 조리가 필요한 한국 음식은 아이들 손님이건 어른 손님이건 뭔가 해야 하나 고민이다. 같이 밤시간을 보내는 슬립오버의 취지를 생각한다면, 사실 먹으러 모이는 것은 아니니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것이 옳을지언정 말이다. 감자칩, 피자, 탄산음료가 파자마 파티에겐 딱인가보다.
파자마 파티와 슬립 오버 문화를 한국에서 꽃을 피우고 싶어 호시탐탐 한국에서 친구 무리가 생기기만을 기다리던 딸을 잘 알고 있었다. 즐기지 못했던 시간들, 오빠만 누리는 것 같아 샘났던 경험들을 딸은 한국에서도 하고야 말겠다 마음먹었다.
딸을 위해 판 깔아줘야겠다. 가볍게 하는 대신에 딸에게 협상을 했다. 이번에는 지난번처럼 엄마와 오빠가 집을 통으로 비워주는 대신 각자의 방에서 없는 듯이 있을 테니 거실과 딸 방을 몽땅 사용하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콜!
전날 마트 배송으로 과일, 과자, 음료수, 버터구이 오징어를 딸 방에 쟁여 넣어주었다. 학원 스케줄이 다른 딸의 친구들이 시간차를 가지고 속속 도착했다. 없는 척 하긴 해야겠지만, 저녁은 공부하고 온 얘들 밥을 먹여야겠어서 삼각 김밥을 10개를 싸두고 안방으로 사라졌다. 아들은 해외 친구들과 게임의 세계로 빠졌다. 온라인 파자마 파티다. 아들에게 안방 화장실을 이용해 달라는 에티켓만 지켜달라 부탁했다.
9시가 넘자, 마라탕이 도착하고 12시가 되자, 나의 카드를 받아가 동네 편의점을 다녀왔다. 쉽 없이 먹고, 밤새 수다 꽃이 피었다.
얘들은 얘들이다. 2시쯤 되니 눈은 반쯤 감겨있는데 펼쳐둔 상의 마라탕과 각종 간식 비닐을 앞에 두고 어쩌나 하는 눈빛으로 거실을 채우고 있다. 엄마 등판이다. 재활용을 치워달라 부탁했고, 설거지 거리는 애벌로 정리해서 싱크에 넣었다. 접시만 날라달라 했다. 펴둔 상을 접고, 이불을 옮겨냈다.
진짜 한국애들다. 아무렇지도 않게 바닥에 깔아 둔 이불에 편한 바지로 갈아입고 누워 뒹굴기 시작한다. 여러 국적의 아이들과 파자마 파티를 했지만, 이렇게 명절날 같은 느낌은 오랜만이다. 늘 슬립오버를 계획하고 준비하고 주관하던 내게 거실에 누워 꺄륵 웃어내는 한국애들이 익숙해서 좋다.
한국에 왔구나. 이제야 피부로 느낀다. 이게 내 나라였지 하고 우리 집 거실에 누운 13살 소녀들을 보며 느낀다. 아들 방에서는 새벽까지 영어로 지구반대편과 게임하니라 한창인 큰 아이가 있다. 우리에게 주어졌던 독일이라는 시간 덕에 아이들과 난 다양하게 살아간다. 새벽 2시, 지금 이곳은 한국이기도 독일이기도 하다. 내 나라 이기도 하며 또 외국이기도 하다. 한국인으로 태어났지만, 독일에서 자랐고, 미국 교육을 받은 아이들 덕에 글로벌한 엄마가 되어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