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날이다. 남편의 조카들이 어린이였을 땐 어린이날을 챙기기에 바쁜 남편이었다. 큰 조카가 초등학교 어학연수를 가면 잘 갖다 오라며 10만 원을 인출해다가 공항까지 배웅을 나갔다. 그의 월급이 200만 원 대였을 때다. 작은 조카가 비싼 학비의 사립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는 50만 원을 주었다. 아이들 교구가 사주고 싶어서 돌반지를 팔았을 때였다. 아주버님들은 모두 의사다.
" 우리가 한 게 뭐가 있어?"
우리가 한 게 없다는 그의 말은 우리의 말싸움을 멈추게 하는 마술이었다. 지난 시간 동안에 네가 해낸 것은 없으며, 나 또한 무능력하다는 말은 나를 심연으로 끌어내린다.
매달 시부모님들의 생활비를 잘 내는 의사 사위들 덕분에, 그 사위들에게 본인의 노후를 맡긴 덕분에 남편은 하는 일 없으며, 쓸모없는 아들이 되었다. 조카들을 위해 없는 생활비를 쥐어짜 두둑하게 쥐어주고 나서야 그는 안심했다. 사람 노릇 하는구나 하며 숨을 내뱉었다.
"이제야 엄마, 아빠한테 효도하네."
부모님과 둘째 누나, 셋째 누나, 조카가 독일에서 지낸 시간은 2달여였다. 것도 독일 도착 첫 해에 그가 부모님을 초대하지 못해 안달이 났지만, 알지 못하는 독일에 그분들을 초대해서 스스로 이룬 성과를 보여주기에 급한 그를 말려야 했다. 결국 독일 생활 2년 차에 그들을 초대한 남편은 북유럽 크루즈로 시댁 식구들을 모셨다.
저렴하게 예약하니라 각각 떨어진 방이라, 남편은 늘 부모님들 방에 있었고 전화는 크루즈 내에선 통화료가 비싸 작은 창문 한 칸의 크루즈엔 나와 아이들 뿐이었다. 그와 그들이 어디 있는지 알지 못한 채 일주일을 여정을 보냈다. 그리하여 북유럽이 지긋지긋하게 싫고, 크루즈는 치가 떨린다.
기항지에 내리면 부모님 보좌하기 바쁘니 아이들 손을 맞잡고 다녔다. 차비가 비싸고, 대중교통 이용이 낯선 남편의 계획 하에 북유럽을 여행하니 걸어 다닐 수밖에 없다. 6살, 8살이던 아이들에겐 덴마크도 노르웨이도 끝없이 걸어야 하는 곳,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3유로. 아이스크림은 3유로, 우리돈 5천원이였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미지근한 여름의 덴마크 아이스크림은 맛 좋아 보이지 않지만, 왜 돌아다녀야 하는지 알 수 없는 아이들에겐 아이스크림 가게는 오아시스다. 아이스크림을 사달라고 조르는 아이들을 마주하고, 무리에서 뒤처지게 되니 걸음을 재촉해 앞서 있는 남편에게 도동전 세 개를 부탁했다.
그가 계획하고 지휘하며 가장이 되어 늙은 부모님과 누나들의 시간과 돈을 이끌어가는 기회였으니 포부가 컸을 것이다. 그에겐 소중한 기회다. 의사가 아니며, 월급을 받는 이며, 막내다. 그런 그가 그들에게 활개치고 다니는 아름다운 유럽을 소개해주고 있다. 스스로를 하늘 끝까지 끌어올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에 아이스크림 사달라고 한다.
" 그만 좀 해."
1유로짜리 세 개를 그는 주지 않았다. 한국이었으면 좋았을 것을, 유럽 길거리 아이스크림 가게는 카드 따윈 통하지 않았다. 예산에 3유로의 어긋남도 허용되지 않았던 걸까? 그에게 아들의 아이스크림은 시의 적절하지 못하며, 돈 낭비였으며, 그의 원대한 성취에 훼방이다.
황금연휴에 제주도에 놀러 간 친구의 개를 데리고 왔다. 아빠에게 개를 접할 기회를 주고, 반려견에 익숙해져 언젠가는 딸이 원하는 개를 키우고자 하는 계획이었다. 비 오는 어린이날, 개를 데리고 산책을 나갔다. 비가 오니 산책길보단 보도블록을 걸어야 개가 덜 더러워진다. 상가거리 어디에도 개가 들어갈 수 있는 장소는 없었다. 입구마다 반려견 금지 스티커가 붙어있다. 개를 다니고 다니고서야 깨닫는 불편함이었다.
" 어린이날인데 배달음식 시켜야겠네. 미안해."
" 엄마가 왜 미안해? 개는 내가 데려왔는데. 그리고 나 배달 좋아."
카드 할인을 받아 알뜰하게 주문한 피자 두 판이 어린이날의 정찬이다. 딸은 개를 데리고 있을 수 있는 시간만으로도 고맙다 한다. 아들은 집 밖에 나가지 않고도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하와이안 피자를 먹을 수 있으니 만족스러워 패밀리 사이즈를 혼자 거의 해치웠다.
행복하려면 노력이 필요하다. 만족은 거저 얻어지지 않는다. 아이들은 남편과는 달랐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저 지금 이대로 내겐 소중하고 귀한 존재다. 가족으로부터의 사랑은 조건이 없다고 살면서 얘들에게 보여주고 싶다. 나는 그렇게 자라지 않았으며, 남편 또한 그러하여 스스로를 증명하려고 살아간다.
내년 어린이날에도 배달된 피자로 고마워하고 행복해하진 않을 망정, 엄마를 만족시키려고 사는 아이들이 되진 않게 할 것이라고 이를 악문다.
아이들이라는 거울 통해 나를 바라본다. 그들 덕에 엄마로 자라나는 나처럼, 남편에게도 짊어진 멍에를 비출 거울이 생겼으면 간절히 기도한다. 부디 자유로워 지길, 스스로를 어여삐 여겨주길 빈다. 다시 유럽출장길에 오른 그가 집 밖에서 자신을 바르게 비출 물웅덩이 하나쯤 발견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