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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박씨 May 11. 2023

싱가폴에선 실루엣만 봐도 설렌다.

 소개팅으로 남편을 만난 지 두 달 만에 싱가포르 출장을 가게 되었다. 당시의 우린 썸 타는 사이여서 지금의 남편, 당시의 소개팅 남에 대한 마음은 간절했다. 때마침 남편은 호주로 출장을 갔고, 우리는 서울에서 다시 보게 될 날을 약속했다. 국제전화를 해야 연락이 되는 때였지만, 출장 나가 국제 전화를 하기도 눈치 보인 데다 호주와의 시차 맞추기도 쉽지 않아 밤만 되면 그와 나누던 대화가 그리웠다.


 그래서였나 보다. 팀장님은 말레이시아로 이동하시고 혼자 싱가포르에 남아 도심 관광을 하던 낮이었다. 선글라스를 미처 챙기지 못해 내리쬐는 싱가포르의 태양아래 게슴츠레 눈을 뜨고 다녔다. 머라이언 근처는 때 마침 싱가포르의 휴일이라 가족들로 가득했는데 저 멀리 홀로 걸어오는 남자가 보였다. 

 심장이 발끝으로 떨어졌다. "K 씨?" 나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음식 주문 외에는 하루종일 말할 일 없어 입에서 단내가 날 지경이었는데, 그와 비슷한 실루엣에 입이 잽싸게 떨어졌다. 

 다행히도, 불행히도 그는 그가 아니었다. 그럴 리가 없다. 그는 지금 비행기로 10시간 넘게 걸리는 태평양 너머서 회의 중이다. 남편일 수가 없다는 사실을 뇌는 반기지 않았다. 눈에 뭐가 쓰이는 순간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서울에선 알지 못했던 간절함은 10시간 거리를 떨어지고 나니 모습을 분명히 드러냈다. 남편이 운명적인 사랑이라 믿었다. 그와 비슷한 실루엣에 얼마나 그를 애타게 그리워하는지 스스로 확인할 수 있었으니까. 






 독일 오버오젤엔 한인이 살 수 있는 집은 제한적이다. 외국인에게 세를 주고 싶은 독일인을 찾기 쉽지 않고, 주재원들이 회사에서 지원을 받아 따박따박 세를 잘 낸다는 것을 숙지하는 독일인이 오버오젤엔 많지 않다. 국제학교 정문으로 향하는 길의 초입에 1번지는 1,1-a, 1-b 이렇게 세 개 동으로 되어있는 단층 아파트이며, 아파트당 8세대, 총 24세대 중 많을 땐 한인 가정이 8세대 30%를 차지했다. 

 애가 셋인 H에겐 1번지 집이 참으로 요긴했을 것이다. 1-b 동으로 H가 이사오던 날, 왠지 모를 싸한 기분에 H에게 눈인사를 하고 그 후로 H를 슬슬 피해 다녔다. 애가 셋이니 도와줄 일이 생기면 어쩌나 지레 짐작했다. 알고 보니 H는 도움을 받기보단 도움을 주면서 스스로를 북돋는 이였다. 

 H는 그녀를 피해 다니는 나는 싫어했고, 나를 싫어하는 H의 눈빛은 느꼈지만 인사는 하고 살자 주의였던 나는 그녀의 눈빛을 피하지 않고 꾸역이 인사를 했다. 

 

" 한국으로 가게 되었어." 

10월에 귀임 발령이 날 줄을 알고 있었지만, 막상 남편에게 전화를 받으니 눈앞이 캄캄했다. 돌아가고 싶은 한국이지만 투덜거림이었다. 돌아가는 날을 맞닥뜨리고 나니 두려움이 앞섰다. 이젠 어쩌나. 

귀임소식을 전하고 다음날 남편의 아침 얼굴은 핼쑥했다. 그 또한 변화에 예민한 사람이다. 나의 두려움까지도 그에게 전염됐다. 창을 열어 그를 배웅하고 돌아서는데 아래층 엄마 M가 보였다. 

이 아침에 어딜 다녀오는 걸까? 

" 안녕하세요!" 

반갑게 인사를 해도 웬일인지 받질 않는다. 아래층 엄마가 셋째를 데리고 1-b동으로 향한다. 

앗! 눈에 씐 것이 걷히는데 소요되는 시간은 찰나다. 분명 1초 전 M으로 보여 반갑게 인사를 건넨 이는 H였다. 

1-b동으로 향하기 위해서는 우리 집 아래를 지나쳐야 하니 H가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민망해하며 시선을 피하는 H의 얼굴이 선명해진다. 

마법을 부릴 수 있다면 지금 당장 H를 M으로 둔갑시키고 싶다. 아....





남편과 말하지 않은지 꼬박 3개월을 채워가니, 무엇 때문에 그에게 화가 났는지 기억이 옅어짐을 느낀다. 그가 내게 던졌던 말들이 심장에 박혀 남긴 상처들은 아물고 있다. 뭐가 쓰인 듯이 그가 좋아 그와 비슷한 그림자만 봐도 설렜던 어린 나 또한 나의 시간이다. 환경의 변화가 두려워 벌벌 떨며 원수처럼 나를 대하던 H에게 아침 댓바람부터 쩅하게 인사를 건네던 나 또한 내 속에 있다. 


남을 바라봄에 나를 보라 보듯 하고, 나를 대함에 남 대하듯 하고 싶다. 내게도 너그럽고, 남에게도 너그러우며, 나와의 약속을 지키며 자신을 보듬어주는 삶을 살고 싶다. 모자라도 잘못해도 괜찮다고 스스로 다독여주는 호박씨가 되고 싶다. 완벽한 척, 잘난 척하며 상처 주고 입은 상처를 영원히 갈 거라며 이를 북북가는 시간은 더 이상 맞고 싶지 않다. 

그의 실루엣만 봐도 싫어 치를 떨고 있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이 이 시간이 지나갈 것임을 안다. 내게 내일이 주어질 것이란 희망을 가지고 산다. 그러니 지금 이 시간도, 이 기록도 지나가리라. 




사진: UnsplashJoshua 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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