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황발작 후엔 낮에 신경을 쓰고 나면 저녁 8시 이후엔 꼼짝달싹하기가 쉽지 않다. 11시가 되면 출출한지 아들은 냉장고를 뒤적거린다. 그런 아들을 위해서 밀키트를 쟁여둔다. 라면 솜씨가 느니 떡볶이나 파스타 같은 밀키트도 잘한다. 설명서를 읽으며 오차 없는 용량을 사용하니 맛이 없을 수가 없다. 주부 15년 차라고 건방 떨면서 눈대중으로, 손맛으로 하면 맛이 업다운이 있게 마련이다. 아들은 또박또박 한글을 읽고, 계량컵을 꺼내 물량을 맞추고 핸드폰 타이머로 시간을 책정한다. 밀키트 제조자가 시키는 대로 해야 의도한 맛이 난다. 특히 라면에 통하는 진리다.
독일의 마트 냉동코너는 알차다. 대부분의 것들이 냉동으로 가능한데, 해산물은 생물보단 냉동이다. 함부르크나 키엘처럼 조그만 창처럼 열린 북해까지 가려면 유럽의 심장인 독일의 최남단에선 10시간도 걸린다. 북해에서 잡을 수 있는 해산물도 제한적이다. 독일인들이 좋아하는 오징어, 이탈리아어로 깔라마리는 깨끗하게 손질된 상태로 냉동고에서 찾기 쉽다.
해산물뿐일까. 밀키트의 원조는 냉동일 것이다. 일주일에 두서너 번 먹던 유럽산 만두, 피자, 피자바게트, 라자냐, 그리고 각종 디저트들이 식품칸 한쪽 벽에 가득하다. 냉동고 안의 성찬은 가격도 훌륭하다. 겨울이라 시들한 채소가 스페인 등지에서 오면 냉동 모둠 야채를 사곤 했는데, 볶음밥, 스테이크의 가니쉬 등으로 이용하기 딱이다.
바닥이 얇은 피자 한판을 밤마다 해치웠다. 왜소한 아들을 키우려면 뭔들 못 만들겠는가? 그런 엄마의 준비는 아들에겐 필요 없었다. 아들이 원하는 건 달콤고소하고 짭조름한 냉동피자다. 갓 구운 듯 뜨겁게 녹아 나오는 치즈를 아들은 사랑했다.
손을 까닥할 필요도 없었다. 얇은 박스에서 피자를 꺼내 덥히면 그걸로 아들의 야식은 충분하니까. 섭섭한 마음은 자꾸 들었다. 한국에선 냉동 피자 자체가 없던 시대여서, 독일 가기 전엔 대형마트에나 있는 또띠야를 겨우 구해다가 비싼 통조림 올리브를 썰어 엄마표 또띠야 피자를 만들어 주곤 했다. 뚝딱 만들어내면 똑딱 저녁 야식은 해결이었는데, 이젠 그럴 필요도 없게 되었으니 시원해야 마땅할 터인데 오히려 위기감이 느껴졌다. 남의 나라 살이에 내 역할은 사라지는 중이었으니까.
주재원 와이프로 해외에 나갈 때에는 회사와의 암묵적인 동의로 내겐 영리 활동이 허락되지 않았다. 따라서 나의 업무란, 집안일 잘하고 얘들 잘 키우는 것 일터인데..... 식사 준비는 냉동피자에게 뻇기고 얘들은 나보다 뛰어난 영어를 구사하니 나의 쓸모는 줄어드는 것만 같다.
터진 코로나에 손만 까닥하면 배달되어 오는 치킨을 먹으며 살만 찐 것이 아니라 근심도 쪄갔다. 더 이상 집안에서 주부는 필요하지 않는다 싶었다. 독일서는 비싼 닭 안심을 사다가 ( 독일은 소의 가성이 가장 좋다. 상대적으로 닭은 비싼 편이다.) 튀겨주곤 했는데, 그때 잘 익혀둔 요령을 아무리 발휘해 본 들 얘들 입에 반기는 것은 배달되어 온 치킨이었다.
잉여 인간이 따로 없다. 강남권 배달비는 3900원까지 치솟았고, 얘들은 배달 치킨에 길들여진 상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핸드폰과 돈이다. 배달 음식이라는 외식비를 감당할 수 있는 엄마가 필요하지, 외벌이에 치킨 잘 튀기는 주부는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이 눈앞까지 다가왔다.
" 이런 거는 실장 시켜야지."
학원 데스크 알바를 나가면서 지우개로 시험지를 지워야 하리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중간고사가 끝나자, 시험지 분석을 위해 재원생들에게 시험지 제출을 권한다. 원장님은 시험지 낸 애들에게 문화상품권을 주라며, 중간고사 분석을 해달라며 선생들을 독촉한다. 아이들이 풀은 시험지의 풀이를 지우고 있는 강사의 손에 들린 시험지와 지우개를 내게 내민다.
" 원래 실장은 이런 일도 하는 거예요."
배달음식비를 벌어야 한다.
퇴근하고 부랴부랴 저녁을 차려내도 국에는 손도 안대는 날도 있다. 봄이라 풀국을 끓여내면, 풀국에 대한 기억과 향수가 없는 애들은 손도 대지 않는다. 독일서 연어 외엔 다른 해산물을 자주 접하지 않은 탓에 조기나 갈치처럼 구워내기만 하는 생선구이도 얘들은 반기지 않는다.
세상은 빠르게 변한다. 아니, 한국은 빛의 속도로 내달린다. 나의 아이들은 빛에 올라타 나로부터 내 달음 친다. 그러니, 그들과 내내 함께 하려면 나도 속도에 올라타야 한다. 독일 주방에서 치킨을 튀기던 주재원 부인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세상이 자꾸 내게 말한다. 변하라 한다. 초보 주부 시절, 블로그도 유튜브 영상도 없어 친정엄마의 여성중앙 부록으로 나온 요리책을 보며 음식을 배웠다. 이젠 아프리카에 갔다 놔도 재료 구하기와 손질 그리고 요리법까지 빠삭해지니, 이것 또한 필요 없단다.
빛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면 내 주변은 캄캄해질 것이다. 어둠이 느껴져 오늘도 기꺼이 지우개를 든다. 뭐 어때? 내켜 시작한 일이며, 내 발로 걸어 나온 전업주부라는 업이다. 그러니 당당해지자. 오늘도 난 빛의 등에 서슴없이 올라탄다.
요샌 치킨도 아니고, 멕시칸이다. 타코, 부리또, 나초도 배달비가 3900원이더라. 아까워.... 멕시칸 잘 시켜주고 이쁨 받는 엄마가 되고 싶다.
대문이미지: 농심 파스타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