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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에 임산부석에 앉는다.

by 호박씨

임산부석을 챙겨앉는다. 서울 지하철 임산부석에 앉은 임산부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초기 임산부의 경우 티가 안 나 임산부 표식이 핑크색 키링을 가방에 달고 다니는데 강남역 길거리에선 마주칠지언정 지하철 안 그들을 위해 배려된 자리에 앉은 경우는 보지 못했다.

그녀들 대신 자리를 차지한 이들은 머리가 하얗게 새진 않은 할머니, 중년의 남자, 외국인 아가씨들이었다. 어떤 마음으로 그 핑크색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는지 알 수 없지만, 엉뚱하게 그 자리에 앉은 이들 정반대 편에 자리 잡고 앉아서 주시한다. 레이저를 쏴본다고 하는 편이 낫겠다.


2007년 황금돼지띠의 해였다. 황금돼지띠 이후 출산율이 그렇게 높은 해는 없었을 것 같다. 생리 주기가 25일로 칼같이 정확한데 생리가 없다. 몰래 산 임신 테스트기로 선명한 두줄을 보지 않아도 이미 묵직한 아랫배로 임신임을 알고 있었다.

현 남편 구 남자친구에게 말한 순간,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그를 느꼈을 때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다. 절대 배불러서 결혼식장을 들어갈 순 없으니, 식장부터 잡아야 했다. 당신 엄마가 올해 결혼 하면 재수 옴 붙는다더라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해야겠으니 해결하라고 토스했다. 친정엄마에게 말했을 때 내게 돌아온 것은 또 침묵이었다. 내게 분노하는 엄마는 마음에 들지 않는 결혼은 네가 알아서 해라였으니까.


우리를 쥐락펴락하는 엄마들, 그런 엄마를 세상 전부로 알고사는 우리들. 엄마의 수치가 되고 나니, 하늘이 잿빛으로 바뀌었다. 어차피 할 결혼인데 점쟁이가 말한 것보다 1년 먼저 하면 안 되나? 어차피 본인 마음에 든 딸의 남자친구면 알았다고 해주고 받아들여줄 순 없었나 보다.

그렇게 두 엄마들에게 푸대접을 받고 나니 입덧이 시작되었다. 분당선을 타고 역삼동으로 출근하는 길에 서너 번을 내렸다. 어지러워 역사 의자에 주저앉아 있기 일쑤였다. 그나마 광역버스보다야 지하철이 나아 이용하였지만 위장이 튀어나올 듯 메슥거려 1시간이면 넉넉히 도착할 데를 2시간 걸려 겨우 도착했다.


CEO가 아끼는 해외영업 소속이라, 사장실에서 회의는 하루에 한 번씩도 있었다. 사장실은 너구리굴 수준이라, 한 시간 정도의 회의에도 그 시절 내가 종종 입던 연핑크색 정장은 전 내음 그 자체였다. 임산부가 되니 화났다. 회의가 끝나고 팀원들과 함께 나가지 않고, 남아 CEO와 마주 앉았다. 회의 때 담배 좀 자제해 주시라 하니, 사장님이 알겠단다.

그에 대한 복수였을까? CEO는 며칠 후 담배 냄새 없는 사장실로 나를 소환하여 싱가포르 답사를 가라 했다. 골칫덩어리인 아들을 싱가포르 고등학교에 집어넣어야 하니, 집과 학교를 알아보고 오라 했다. 출장도 아니고, 비서업무도 아니고, 집사쯤 되는 셈이다. 속이 뒤집어져 겨우 출근하는 마당에 싱가포르까지 비행기를 타고 갔다 오라니....

1년 먼저 들어온 팀원에게 양보를 했다. 나이는 동갑이지만 그쪽인 선임인데 내가 먼저 출장 나가면 쓰겠냐 했다. 간신히 싱가포르행을 면했고 선임인 팀원에겐 고맙다는 인사를 들었지만, 위기 천만의 순간들만 계속 발생했다. 회식자리는 늘 있었고, 한약 먹는다는 핑계로 술을 마다했지만 쉽지 않았다. 회식이 끝나면 노래방도 으레 갔는데 평소 같으면 불꽃처럼 팀원들을 즐겁게 해 줬겠지만, 업무가 끝나고 나면 기력이 떨어져 빌빌 대었다.


그렇게 죄인이 되었다. 화냥년은 오죽했을까 싶었다. 지옥철이었던 지하철 한편에 나를 위한 진핑크색 자리가 있었다 해도, 아마 세상 눈이 무서워 앉을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마흔의 중반 아이들이 중학생이 되고, 나보다 머리 하나 더 커진 지금에서야 임산부 자리를 지키고 앉는다.


" 엄마, 왜 자꾸 임산부 자리에 앉아?"

"엄마가 임산부 자리가 필요할 땐, 없었거든. 그래서 억울해서... 히히"




아들을 임신했을 때는 혼자서 꽤나 빨빨거리며 돌아다녔다. 아들을 임신한 초기에 연일 피가 비쳐 산부인과에 가니, 한 달 정도 꼼짝 말고 누워만 있으라 했다. 한 달을 아이가 없어지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에 침대 붙박이를 하고 나니 외출이 고팠다.

그날도 점심 먹으러 친구를 만나러 가는 지하철이었다. 낮시간이라 북적이진 않지만, 앉을 자린 없어 노약자 석 앞에 서 있었다. 누군가 바짝 뒤에 선다. 엉덩이쯤에 느껴지는 불룩함이 불편해서 뒤를 쳐다보니 웬 남자가 빤히 쳐다본다. 얼굴이 확 붉어졌다. 그가 눈을 피할 생각 없이 내 등뒤에 몸을 밀착하고 있기에 부랴부랴 자리를 떴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옆 칸으로 옮겨갔다.

보이지 않겠다 싶을 때까지 이동하고는 정신을 차려 배를 쓰다듬어 주었다. 괜찮다. 아무 일 없다.

만난 친구에게라도 방금 전에 임산부에게 일어났던 추행을 털어놓았더라면, 15년이 지난 사건을 간직하고 있진 않았을 것이다. 임산부석이 있었더라면, 당시 꽤 부른 배를 가진 내게 미친놈이 몸을 비비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황금돼지띠 아기를 출산할 뻔했던 그 임신은 계류 유산으로 맺어졌다. 계류 유산은 약한 태아의 심장이 저절로 멈춰 유산이 되는 것을 말한다. 자연의 섭리다. 탄생의 과정을 통과할 만큼 튼튼하지 못한 생명은 지구별에 등장할 수 없다. 심장 소리를 두 번째 들으러 갔을 때, 의사는 계류 유산이 되었으니 수술이 필요하다고 했다.

시어머니가, 당시의 남자 친구였던 남편이 원하지 않는 타이밍에 치러야 했던 결혼식은 없어도 되는 상황이다. 다들 홀가분할 터이다.

계류 유산도 유산이라 죽은 태아를 자궁에서 꺼내야 한다. 수술은 반나절이 소요됐고, 반나절만에 나는 다시 처녀가 되었다. 깔끔하게 흔적이 사라졌다고 모두가 여기는 순간, 내겐 허리 통증이 찾아왔다. 퇴근 후에 누워도, 퇴근 전에 사무실에 앉아있어도 오른쪽 허리가 욱신욱신해서 없어진 아기가 허리에 매달려 있는 듯했다. 뱃속엔 아무도 없는데 허리는 계속 아프다.

병원이 즐비한 역삼동의 아무 건물이나 들어갔다. 검색도 하기 귀찮았나 보다. 나이 있어 보이는 정형외가 의사가 혀를 찼다.

" 아니, 왜 임신 중절 수술을 했어요. 아가씨가..."

허리 통증이 언제부터 시작됐는지에 대해서 자초지종을 말해야 그가 나의 통증을 멈출 수 있을 것 같아 임신, 계류 유산, 수술까지 자세히 고했다. 의사 가운을 걸친 그가 나를 향해 내뱉었던 말을 15년이 지난 지금도 잊지 않는다. 아무 말이나, 아무렇게나 말하지 말자 마음먹는다, 오늘도.

의사는 허리통증을 낫게 하지 못했다. 그런 말을 내뱉는 이가 실력이 있을 턱이 없다. 비 오는 날은 허리부터 아프다. 황금돼지띠가 될 뻔했던 생명의 씨를 비 오는 날, 비 오기 전날 느낀다. 그저 허리가 아플 뿐인데, 늘 15년 전 그 수술실로, 역삼동 병원으로, 출근길 지하철로 내달아간다. 잊히지 않아 난 늘 그 자리에 되돌아가있다.


사진: UnsplashJuniperPho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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