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아픈 일들이 계속되면, 자연스레 내가 무슨 죄를 지어서 이러나 하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요샌 신이 나를 사랑해, 아프고 힘들지만 살아갈 수는 있는 정도의 고통을 준다 여긴다. 그러려고 최선을 다한다.
오전에 아버지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남편이 출장을 잘 갔다 왔냐며, 어째 얼굴 본 지가 한참인데 오지도 않고 소식도 없냐고 하신다. 마지막으로 아버지 얼굴을 뵀던 구정이 막 지난 주말에 남편은 미소 한 번을 띠지 않았고, 아버지를 보며 대답 한 번 제대로 하질 않았다. 아내가 싫으니 장인어른도 싫다는 그의 감정은 고스란히 얼굴에 떠올랐고, 그를 되도록이면 빨리 친정거실에서 끌어내고 싶은 마음만 굴뚝이었다.
차마 그를 다시 아버지 앞으로 데리고 갈 용기가 내겐 없다. 나의 아버지는 말수가 적으시다. 사위에게 이거 해라 저거 해라 라는 말 한마디를 한 적 없는 늙은이를 그가 차갑게 대하는 장면은 다신 마주하고 싶지 않다.
" 아빠가 전화해 보세요. 어버이날도 전화 안 드렸죠?"
" 일하는 사람한테 무슨 전화를 해."
" 점심시간이잖아요. 전화해 보세요."
무뚝뚝한 아버지의 목소리에 그리움과 서운함이 묻어났다. 아빠, 미안해.
요샌 퇴근하며 루틴처럼 친정엄마에게 저녁메뉴는 뭐였냐고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는다. 오늘은 엄마가 씩씩거리며 전화를 받는다.
" 말하다 보니까 더 열받네. 아니, 동네 지나가는 노인네 한테도 안 저럴 거다."
멋쩍게 전화를 끊은 아빠 옆에서 엄마는 사위와 장인의 대화를 다 파악해 버렸다. 전화해 보라는 나의 말대로 사위 점심시간에 전화를 건 아버지가 들은 말은 마지못해 대답하는 '네' 뿐이었다고 한다. 왜 전화했냐는 감정이 뚝뚝 묻어나는 대화를 이어갈 수 없어 통화를 종료하는 아버지를 보면서 엄마는 펄펄 뛰었나 보다.
15년 전 첫 부부싸움이었나 보다. 대화 몇 마디를 나누다 남편은 나가버렸다. 그가 없는 집에 오도카니 있다 보니 그에 대한 걱정에 온몸이 떨렸다.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혹시 그가 연락을 했냐고, 싸우고 나갔는데 전화도 받지 않아 그가 염려된다고 상황을 솔직하게 말했다.
" 그 착한 얘가 오죽하면 나갔을까!"
하며 역정을 내셨다.
싸우고 집 나간 남편을 해운대 시댁에서 찾을 만큼 어리석은 나였다. 싸워도 한 집에서 살은 비비면서 싸워야지, 어찌 말을 잇지 않고 떠날까 하는 섭섭한 마음을 시어머니에게 고하는 멍청한 아낙이었다. 남편이 내게 그려준 어머니는 아버지로부터 평생 곱지 못한 말을 들으면서도 인내하고 자식을 끝없이 사랑하는 자애로운 엄마였다. 나도 그런 어머니의 다섯 번째 아이가 되어 사랑받는 며느리로 살고 싶었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여줘야 하고, 솔직해야 하겠다 싶었다. 어머니에게 진짜 나를 보여드리고 사랑받을 수 있다면 그보다 더한 행복이 어디 있을까 싶었다.
얼떨떨해 잽싸게 전화를 끊었다. 어머니도 소리 지르시곤 곧 끊고 싶어 하시는 눈치셨다.
밤늦게나 돌아온 남편에게 어제의 일을 말하니, 다시 집을 나갈 태세였다. 부부싸움이 뭐 자랑이라고 부모한테 고하냐고, 눈치 백 단의 막내 마인드로는 도저히 우직한 나를 이해할 수 없어했다. 그날도 남편은 서늘한 눈빛과 뻣뻣한 어깨를 가지고 있었다.
제대로 산다는 것은 어쩌면 진흙탕에 나뒹굴어져 누덕 해져본 일이 있는 삶일런지 모른다. 질척하고 더러워 보이는 진흙을 아무리 묻힌다 해도 죽진 않는다. 그저 부끄러울 뿐이다. 기분이 더러울 뿐이다. 왜 내게 이런 진흙구덩이를 맞닥뜨리게 했냐고 신에게 악다구니를 쓰며 묻는다면 신은 이렇게 답할 것이다.
" 그게 진짜 삶이다. 넌 살아있지 않느냐? "
학원알바를 하며 아무리 이해가 가지 않는 이를 마주하고, 상식이라곤 한 톨도 찾아볼 수 없는 상황이 닥칠지언정 놀라거나, 화나지 않는다. 진흙 따윈 묻으나 마나다. 더러워진 옷은 벗어던지면 되고, 더러워진 몸은 씻으면 그뿐이다. 깨끗이 씻고 나면 구른 덕에 더 건강해진 내가 될 수 있다.
내 자식이 아니니 실컷 나무라려고 마음먹은 친정 엄마에게 허허 웃으며 답한다.
"엄마, 나도 철든 지 얼마 안 되었잖아. 엄마 사위도 아마 언젠가는 철들 거야. 오늘 전화한 거 후회할 날이 올 거야. 그때까지 기다려주라. 그날이 꼭 올 거야."
" 언제!"
점심 많이 드셨나 보다. 기운이 넘치는 우리 엄마 목소리가 전화기 밖으로 튀어나온다. 아버지와 남편의 전화를 듣지 않고도 도청이라도 한 듯 미리 예감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전화를 걸 것이란 것도, 그가 그렇게 아버지를 대할 것이란 것도 느끼고 있었다. 그러니 하루 종일 뒷목이 뻣뻣하고 자꾸 눈물이 난다. 철든다는 건 마냥 좋은 일만은 아니다. 더 너그러워지라고 신에게 챌린지를 당하며, 더러운 꼴은 앞으로도 계속 봐야 한다는 사실을 내다보니 철든다는 게 반갑지만은 않은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