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지를 지나 나가면 오피스 거리다. 이 시간이면 직장생활의 행복 점심식사를 마치고 삼삼오오 사무실로 향한다. 다시 일하러 들어가는 무리들과는 다르게 아파트 단지 안은 고요하다. 나이 드신 분들이 많은 대형 평수 아파트라 더 그렇하다. 야구르트 판매 하시는 분의 카트 옆엔 영업이 한창이다.
" 이건 하루에 3번 2알씩 드시면 되고요."
중 할머니옆 중 할머니다. 카드를 쥔 할머니는 돈 쓸 거리를 만들어 내신다. " 우리 남편이 눈이 침침하다고."
영업 할머니는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들뜬 목소리가 조용한 12시 나절의 단지를 경쾌하게 만든다.
" 이거 드셔."
반 높임, 반 낮춤의 말로 대한다. 시간도 많고 돈도 있는 할머니는 영업 할머니의 먹잇감이다. 곧 카드 꺼내실 듯한 태세다.
우리 엄마였다면, 옆에서 말렸겠다. 물론 30년의 약국일로 나름 약아진 엄마지만, 건강 외의 분야 그리고 엄마가 가장 마음 쓰는 우리 얘들 분야에서는 판단이 흐릿해지곤 한다. 아들이 한창 한국학교가 힘들다 해서 엄마에게 내 무거운 짐을 토로하니, 살고 있는 분당아파트 팔아서 국제 학교 보내야겠다고 한다. 제발... 엄마....
동생 카페 나가서 한창 일할 때 나름 스트레스받았더니 아토피가 손바닥과 팔뚝 부위에 극성이었다. 20년 지기 약국 옆 속옷 가게 아주머니가 다단계 하신 지도 참 오래였는데 한 번도 사지 않던 엄마가 고가의 비누를 사들고 왔다.
" 이 비누 쓰면 낫는단다."
소리 질렀다. 엄마! 그 비누 살 돈 나나 주라. 다단계에 보태지 말아 줄래? 엄마가 안 사도 그들은 뒤집어 씌울 사람이 넘쳐난다고. 아토피가 비 누으면 나을까. 그랬다면 그 비누를 개발한 이는 노벨상을 받고야 말았을 테다. 아토피가 나을 수만 있다면 작디작은 Bar 1개에 만원 받을 게 아니라 1000만 원이라도 바칠 수 있다. 나뿐만이겠는가? 아토피를 겪어본 이들은 더 큰돈도 비누회사와 다단계 영업장에 갖다 바칠 셈이다.
대화를 하기 시작하니, 일단 기분은 좋은 가보다.
"보고가 많아서 여름 쟈켓을 하나 사야겠는데."
벼르고 있었나 보다.
쑥쑥 크는 아이들 덕분에 153cm의 키인 나로선 옷 사주는 시간은 즐기지만, 사이즈가 늘어나 한철을 못 입으니 옷값이 부담스럽다. 홍콩 중저가 브랜드 Gio**** 매장이 집에서 10분이라, 앱을 이용해서 쿠폰을 챙기고 적립금에, 할인과 번개 세일을 챙겨 저렴하지만 깔끔한 새 옷을 사다 입히고 있다.
매장 3층엔 남성복이 구비되어 있는데 중저가 브랜드답게, 남성복 가격도 합리적이다.
"응. Gio****가자. 6만 원이나 적립금 모아뒀어."
"백화... 점은?" 하면서 그가 말을 흐린다. 패션회사에 다니는 것도 아닌데 왜 백화점에 가야 해? 보고하러 들어간다며? 보고 받는 어르신들이 선호하는 복장을 입고 들어가면 되는 거지.
틀린 말은 아니지만, 기분은 사뭇 나쁜지 자리를 뜬다. 그의 뒤통수에 대고 말한다.
"백화점 가서 직접 사 입는 건 반대하지 않아. 알지?"
엄마카드, 엄마찬스 엄카를 들고 다니는 얘들이 많다. 딸아이가 친구들과 외출하고 나면, 엄카로 티셔츠 쇼핑을 척척하는 얘들 이야기도 하곤 했었다. 기죽으면 어쩌나 싶었다. 처음엔 그랬다. 그러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부모의 돈으로 옆 사람 기죽이는 아이라면 친구 하지 않는 편이 낫겠다. 부모의 돈을 쓰는 이로부터 기죽는 아이라면 마음부터 추슬러야겠다 싶다.
나로부터 돈을 바라보는 마음을 다잡지 않는다면, 한국에서 행복하게 살긴 쉽지 않을 예정이다. SNS에 올린 누군가의 씀씀이가 그 사람의 됨됨이를 뜻하는 세상이다. 돈 많고 돈 잘 쓴 이는 오늘의 나와 다르겐 얼마나 행복하겠는가? 우리는 그를 존경해 마지않는다. 핸드폰을 내려놓고 거울을 들여다보면, 부숴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돈이 없어서, 돈이 많지 않아서, 난 불행해. 이런 옷, 그런 신발을 신고 있으니 난 불행한 게 틀림없어.
카페 홍보를 위해 부지런히 인스타를 하다 내려놓았다. 학원에서 알바를 하게 되니 이번엔 학원 홍보를 위해 인스타에 들어간다. 백내장 걸린 듯 흐릿한 판단의 누군가를 향해 나를 선택하면 당신은 행복해질 수 있다고 광고한다. SNS를 할 줄 모르는 남편은 대기업이라는 집단 속에서 비슷비슷한 타인들과의 무한 경쟁 속에서 행복해지려고 안간힘을 쓴다. 보고 자료를 갖추고 회의실로 들어가는 긴장과 두려움을 그의 목 뒤 쟈켓 안쪽의 브랜드 태그가 해결해 줄는지 모른다. 설마? 진짜? 만 원짜리 재킷은 만원 어치의 위로를, 100만 원짜리 재킷은 100만 원어치의 위로를 그에게 제공한다면 기꺼이 100만 원짜리를 그를 위해 카드 할부로 구입하겠다.
진실이 아니다. 비싼 쟈켓은 동료들과 식당이나 회식 자리 의자에 뒤집어 걸음으로써 그 빛을 발하겠다. 싼 재킷의 진가는 이렇게 저렴한 거 입는구나 하며 남편을 무시하는 이를 판별할 수 있다는 점이다. 어리석은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는 자가 될 수 있다. 10만 원이지만, 쿠폰과 적립금으로 5만 원에 샀다고 알뜰한 와이프를 자랑한다면 남편도 난 사람이 되는 셈이다.
contented.
속에 들은 내용물을 뜻하는 콘텐츠에서 나온 말이다. 삶으로 남편에게 새겨 주고 싶은 단어, 나의 오늘에 화두가 되는 단어다. 우리말로 길게 풀어낸다면 지금 현재에 만족스럽다는 뜻이다. 가훈으로 정해볼까 한다.
자족. 누군가의 먹잇감이 되지 아니하며, 타인으로 나를 비춰 스스로를 미워하지 아니하며, 숨 쉬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을 스스로 축복하는 삶이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Contented 한 호박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