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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박씨 Jul 13. 2023

당신에게 도피란 어디인가요

10%의 확률이란 거 보니 10명이 유럽법인 후보감인가 보다. 스스로에게도 민망할 지경이다. 유럽 법인의 법인장 자리가 비었다는 소식에 설레다니 말이다. 절대적인 키는 조막만 해도 상대적으로 커 보인단 소리를 종종 듣는다. 껍데기 속엔 사실 단단하게 삶 속 허들을 넘어가고 있다고 자부한다. 그런데 설렌다니! 난 결국 늘 어디론가 피하고 도망가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솔직한 이야기는 맨 정신으로는 하지 못한다. 남편에게 도피처는 술에 약한 스스로의 체질이다. 소주 반 병에서 늘지 않는 그의 주량은 아마 계속일 것이다. 어제도 다르지 않았다. 

"후보가 10명이야. 일단은 후보엔 올랐어."

그의 음성엔 여러 가지 음색이 묻어난다. 간절히 가고 싶지만 확률은 떨어진다는 사실이 그 첫 번째다. 뭔가를 원한다고 말하길 조심스럽다 못해 죄스럽기까지 여기는 남편이다. 한국에 오자마자, 코로나의 갇힌 상황에서 캐나다 무역공사의 인터뷰가 있었다. 캐나다에서 대학을 졸업한 그는 캐나다에서 일하고 싶었다. 몹시 간절히 원했다. 떨어졌다는 소식에 그는 눈을 제대로 맞추지 못하고 말한다. 되길 기대하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한다. 그는 스스로를 들여다 보길 최선을 다해 피하는 셈이다.


과연 우리에게 살만한 곳은 존재할까? 내내 여기서 살길 잘했다 싶은 생각이 드는 삶이 있을까?

" 제발 독일 안 가게 해 주세요."

딸의 보급형 갤럭*가 수명을 다해간다. 24개월 약정으로 아이폰을 손에 넣고 싶은 아이다. 3개월 후에 독일 발령 여부가 발표 나면 핸드폰 바꿔주마 했다. 알쏭달쏭한 표정을 한 딸이 말한다. 독일 발령이 나지 않는다면, 약정 할인을 받은 새 아이폰이 아이의 손에 쥐어질 예정이고, 발령이 난다면 다시 유럽의 삶이 아이 앞에 놓일 예정이다. 한국 음악도, 한국 학교도, 그리고 그 무엇보다 한국 아이들이 좋은 딸아이는 부디 제발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빈다. 이제 딸아이는 중고 아이폰 조사의 세계로 도피한다. 미래는 내게 밝을 것이다고 긍정적으로 여기는 딸에게 단짝 친구들과의 대화는 위안을 준다. 


10%의 확률이라는 말에 눈물이 흘렀다. 도대체 한국 시험의 형태에 적응할 의지가 없어 보이는 아들은 무사히 한국 입시에서 인서울 대학이나 갈 수 있을까 싶다. 수학을 못해본 적은 있어도, 수학 외의 과목을 못해본 적은 없는 학생이었다. 생전 보도 못한 점수, 30점의 국어, 40점의 역사 점수를 보고 있자니 오만 가지 생각이 들어 도망가고만 싶다. 격렬히 도피하고 싶은 욕구가 든다. 친구 없는 아이, 공부 못하는 중3. 아들에게 부여되는 오늘의 꼬리표에 한없이 불안하다. 도피! 기꺼이 하고 싶다. 


4인 가족이라 우리의 서사는 4인 4색이다. 아이들이 둥지를 떠나는 날까지 우리의 이야기는 같은 무대에서 펼쳐질 예정이다. 호박씨네 가족이라는 연극을 기획한 전지전능한 누군가가 무대 세트를 바꾼다고 하더라도 내게 주어진 역경의 총량은 일관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기에 도피는 가당치도 않다. 전능한 이에게서 뒤돌아 꿍꿍이를 꾸밀 만큼 당장이 힘든 때가 있다. 지금이 내겐 그런 때인가 보다. 다시 유럽법인으로 나가게 된다면 말이야 라며 타운하우스, 쇼핑, 아이들 학교를 꿈꾸면 순간 그리 달콤할 수가 없다. 

글이 없었다면, 내 기억 속 주재원 생활은 천국이었을 것이다. 하나 호박씨가 된 이상 더 이상 기억을 편집하긴 어렵다. 코로나 덕에 낱낱이 기록했다. 더도 덜도 말고 한국만 같아라, 심지어 방역으로 고립된 상황에서도 한국이라 행복해했던 나를 잊지 않는다. 

고생이 삶을 행복하게 만든다. 결핍이 나를 기쁘게 한다. 그러니, 다시 유럽으로 가게 된다면 나를 기다리를 것은 고생과 결핍일 것이다. 10%의 확률에 기대어 찰나에 황홀함을 느껴보다가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어디 멀리서 행복하길 기대하지 말자, 호박씨. 정신 차려! 

당신에게 도피란 어디인가요? 도피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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