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네의 일기 말고
-주재원의 일기 속 독일 떠나던 날
"엄마, 갑자기 날씨가 독일 됐어."
남편의 출장으로 내 침대에서 같이 자고 일어난 작은 아이가 눈 뜨자마자 이불속에 파묻혀 춥다고 한다.
타국의 날씨여서 독일 날씨가 쌀쌀하게 느껴진 것이 아니라 우기가 겨울인 독일은 한국보다 늘 낯설게 차갑다. 여름 같지 않은 여름이 지나고 나면 찌부드한 가을이 다가오고 기나긴 겨울이 온다. 그래서 독일 비가 싫었다. 눈은 더 싫었다.
비는 늘 차가운 계절에만 내린다. 얼굴에 닿으면 시리게 차가운 빗방울이 독일의 비다. 도착하던 첫날은 그래도 운이 좋아 비는 오지 않았더랬다. 바닥에 고인 얕은 웅덩이들을 보면서 비가 왔겠거니 추측할 수는 있었지만, 추운 날씨를 더 춥게 하는 비는 오지 않고 길가 드문드문 녹은 눈들만 눈에 띄는 그런 손발 끝이 시린 그런 날이었다. 그래도 그 많은 짐들을 수속해 나오는 날 비가 왔더라면 더 힘들었겠지.
2019년 12월 23일, 떠나는 날은 날씨 운이 없었다. 하루 종일 차가운 비가 내렸다. 가까이 사는 베트남계 미국인 트랭네 집에 아이들을 맡기고 집주인을 기다렸다. 늘 놀러 가던 집이었지만 마지막 날은 어떻게 인사를 해야 하나 어색하기 짝이 없어서 아이들 맡기기도 좀 꺼려졌지만, 이것 저것 저녁 비행기 타기 전에 처리해야만 하는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트랭은 당연히 자기 집으로 애들을 보내야 한다고 미리미리 이야기했었다. 고맙게도 말이다.
윈터 브레이크 겨울 방학이라 웬만히 친한 외국인 엄마들은 다 새해맞이 여행을 가고, 한국 엄마들도 한국을 방문해 있는 것이 대부분이라 정말 마을에 있는 이웃은 트랭뿐이였다. 먼 친정 미국은 아이 셋 외벌이 형편에 자주 가기 부담스러웠고, 가까운 아일랜드의 남편의 시댁 역시 그녀에겐 집 같은 공간은 아녔을 것이라 추측해보았다. 새해는 남편과 세 아이와 정말 패밀리 타임을 갖곤 했던 그녀였으니까 말이다. 해가 바뀌는 날은 어김없이 아침에 좀 일찍 일어나 남편과 다 큰 아이들을 데리고 타우누스 뒷산을 오르고 가족사진을 찍고 왓츠앱으로 그 가족사진을 친구와 친지들에게 보내는 것이 그녀의 한해 보내기, 새해맞이였다. 세상 시크한 그녀. 그녀와 친구여서 감사하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지만, 마지막까지 이렇게 따뜻한 그녀를 두고 떠나는 것은 마음 아픈 일이었다. 去者必返 떠나는 날이 있으니 만나는 날이 있겠다는 한자어를 그녀에게 전할 것을 후회가 된다. 베트남 뿌리가 있는 그녀는 한자도 꽤나 익숙해하니 말이다.
도이치 방크 은행 일이며, 라트하우스 동사무소 일이며, 집주인을 만나 열쇠를 건네주고 집 내부를 함께 점검해 보는 일이며 어떻게 하루에 다 지나갔는지 모르게 바쁜 하루였다. 서울로 출발하는 대한항공은 늘 저녁 비행 기니 이렇게 또 비워둔 하루가 통으로 생겨 일을 처리하고 가는구나 싶다. 아침 비행기였다면 우린 속절없이 그 전날 이 모든 일들을 다 처리하고, 캐리어 가득 짐을 다 챙겨 공항 앞이나 집 주변 어떤 호텔에서 하루를 묵었을 터였다.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우리는 도착한 첫날도 우리 집, 떠나는 마지막 날도 독일 우리 집에서 지냈다. 내 복이다. 나는 온전히 모든 기억들을 갖고 있는 소중한 한 공간을 지구 반대편에 갖게 되었다.
그리고 계속되는 비. 아이들을 데리러 트랭네 집으로 갔다. 우리 가족이 돌아가겠되었다는 소식을 알렸던 발령일에 이미 울 것 다 울은 트랭은 담담하다. 밤톨처럼 야무진 그녀. 미국식으로 안아주고 내년에 올 것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답하지 않는다. 트랭은 알고 있었다. 뜻대로 계획한 대로 인생이 되진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나는 결혼할 때 남편을 졸라 명동 롯데에서 샀던 모피를 입고 있었다. 컨테이너에 넣으면 이 소중한 모피코트가 적도를 지나가며 컨테이너 안에서 손상이 될까 싶어 남겨 두었다. 독일 올 때도 마찬가지였다. 겨울엔 모피지 하며 12월의 독일 날씨가 어떠할지도 모르면서 나는 모피코트를 입고 왔다.
그런데 독일 겨울에 모피는 최악이다. 춥고 흐리다가 비 오고, 흐리다 눈 오는데 모피 따윈 거추장스럽기만 하지, 방수와 방풍이라는 역할을 전혀 해내지 못한다. 게다가 세탁비도 한국의 3배에서 심하게는 5배까지 차이가 나 쉽게 세탁을 맡길 수도 없었다. 독일 겨울엔 가뭄의 콩 나듯 있는 맑은 날, 모피도 숨은 한번 쉬어야 하니 반나절 입고 나갔다가 발코니 밖에 걸어 바람으로 세탁하는 정도가 다였다.
그런데 저녁 비행기를 타야 하는 나에게는 트렁크 4개와 이민가방 3개가 있다. 거기에 비. 남편이 마을 시내에서 은행일을 보면서 트렁크용 자물쇠는 어디서 사야 하냐고 묻는다. 내 나라 살듯 살겠다며 활개 치고 살던 나인데 왜 자물쇠라는 말에 머리가 하얘졌다. 한국서 새로 온 주재원 와이프들을 데리고 늘 마트 오리엔테이션이며 마을, 프랑크푸르트 시내까지 오리엔테이션을 해주던 나인데 말이다.
열쇠 가게가 생각났다. 독일은 여전히 열쇠로 문을 연다. 쇠막대기 열쇠 말이다. 아날로그 세상 독일에서 열쇠 그리고 문 하면 사연이 많다. 열쇠를 꽂고 문을 닫거나 열쇠를 집안에 놓고 문을 닫으면 열쇠공을 불러야 하는데 보통 100에서 150유로 정도, 한 번의 실수로 20만 원 순식간이다. 그래서 마을의 싼 열쇠공 한 군데쯤은 전화번호나 위치를 알고 있어야 한다.
열쇠가게에는 파우제, 점심 겸 쉬는 시간이라 문이 닫혀 있다. 나는 모피코트를 입고 비를 잔뜩 맞고 있는데 말이다. 우산 하나 사서 쓰고 다니지 하겠지만, 우산 살 생각도 못하고 그저 자물쇠를 구하러 다녔다. 톡톡 모피코트에 맺혀있는 빗방울을 보니 괜히 기분이 축 처지고 뭔지 모르게 서러웠다. 독일은 떠나는 날까지도 정 없고 차갑다 싶었던 것 같다.
안 되겠다 싶어서 우산을 사러 드러그스토어로 갔다. 그 드러그 스토어에 말도 안 되게, 자물쇠가 있었다. 이날도 드러그스토어는 여러모로 나를 도와주는구나. 유럽서 뭐가 없다 싶으면 드러그스토어 가면 된다. 편의점 찾지 말고. 발상을 한 번만 전환하면 고생 안 한다. 뭐가 필요하다 어디서 파는지 모르겠다 싶으면 DM, Rossmann이다. 드디어 구했다. 자물쇠. 이깐 자물쇠가 뭐라고 이걸 못 구해서 모피 바람에 비 맞으며 마을 시내를 헤맸을까? 이 시골 동네 시내, 나름 없는 것은 없지만 마뜩히 살 것도 없어서 투덜투덜하며 헤집고 다녔던 오버오젤 시내를 구석구석 담아 가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자물쇠도 구하고 공항으로 향했다. 프랑크푸르트 공항 캐리어는 동전 없으면 안 되니 여전히 유로 동전도 필요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면 막이 바뀌고 장면이 바뀌면서 세팅 완전히 다 바뀌는데 인생은 그와는 전혀 다르다. 내 지갑에 여전히 들어있는 10센트짜리, 50센트짜리 동전들, 도이치방크 은행 EC카드, 내가 들고 있는 캐리어 속의 짐들, 입고 있는 속옷부터 시작해서 심지어 양말까지 다 여기 독일의 것이다. 나와 함께 한국으로 돌아가는 내 아이들이 구사하는 독일어와 국제학교에서 배운 독일스러운 매너까지도 모두 이곳의 것이다. 공항 문을 통과하는 순간 마치 버블 슈트를 입은 기분이었다. 내 모든 것이 독일의 것인데 이 공항에서부터 나는 한국인 여행자다. 둥둥 나와 내 아이들은 독일의 기운을 그대로 지닌 채인데 말이다.
모피코트를 입고 비를 맞으며 트렁크와 이민 가방을 옮겼다. 안네의 일기에서 안네는 입고 갈 수 있는 최대한, 가지고 갈 수 있는 최대한의 것들을 가지고 비밀 숙소로 향한다. 안네는 그날을 이렇게 말한다. 서너 겹의 속옷과 겉옷을 겹쳐 입느라 움직이기조차 힘들었다고 말이다. 불안하고도 이상한 그날에 안네가 느낀 변화란 그런 것이었다. 그날의 흐린 날씨, 안네의 옷차림. 그리고 변화.
차에서 내려 공항 안으로 향하며 나는 내내 안네의 일기를 떠올렸다. 독일 생활의 끝맺음 또한 흘러가는 일상일 뿐이다. 일기의 한 페이지 거리밖에 되지 않는 일상이다. 여느 날들과 다름없이 24시간인 그런 날이고 이 날의 일기라고 해서 형광펜으로 하이라이트 되어있는 것도 아닌 보통날. 이렇게 되돌아보며 그날의 소리와 냄새를 기억 속에 배경음악과 효과음으로 넣어 본다. 안네의 그날도 안네가 남긴 일기로 말미암아 오늘도 생생히 살아있듯 나도 그날이 살아 숨 쉬게 되돌이켜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