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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마을 차차차

- 거리두기가 되시나요?

by 호박씨


2015년 1월 첫째 주에도 나는 시차 적응은 못하고 있었다. 아침 아니 새벽 6시 현관 벨이 울린다.

윗집 S였다.

calvin-hanson-akR7Rnq-TGQ-unsplash.jpg Schlüssel

아파트 보눙의 현관문은 나무문이다. 한국 현관문에서 도어록이 있는 위치쯤에 쇠막대기 열쇠 Schlüssel을 꽂아서 나무문을 잠글 수 있는 자물쇠가 있다. 이 현관문을 닫으면 문이 자동으로 잠긴다. 열쇠를 집안에 두고 문을 닫으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서는 상상에 맡기겠다. 독일에서는 집에 불이 나면 이 나무문을 소방관이 도끼로 부수고 들어간다는 정도의 사실을 참고하면 좋겠다.

외출 시 현관문을 잡아당겨 닫기만 하면 잠금 상태를 만들 수 있는데, 잡아당긴 상태에서 Schlüssel을 꽂아 돌려 한 번 더 잠글 수 있다. 이 자물쇠는 또한 집 안에서도 잠글 수 있다. 열쇠를 바깥에서 꽂아 돌릴 수도 있고 집 안에서 꽂아서 돌릴 수도 있다. 집 안에서도 이중 잠금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이 주 잠금장치 위에는 걸쇠를 걸 수 있는 체인이 있다. 체인을 걸어둔 상태에서 문을 열면 문이 반의 반 정도만 열림이 가능하다.


그날 6시에 울리는 현관 벨 소리에 나는 분개했다. S 엄마는 S를 이 시간에 내려 보냈단 말인가? 며칠 전 나에게 와이파이를 빌려주었고, 본인의 차로 마트에 장을 같이 보러 가준 그녀다. 그렇다고 해서 아침 6시에 그녀의 아이가 나의 집에 와도 된다는 뜻은 아니었다.

나는 문 밖으로 난 손톱 만한 볼록 거울로 윗집애를 확인했지만 문을 열지 않았다. 타국에서의 첫 주라 나는 주 자물쇠며 체인이며 문을 이중 삼중으로 다 잠가두어야 맘이 편안해졌다. 두세 개의 잠금을 풀고 문을 열어 아이에게 대꾸해주는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9시쯤 되었을까? 아이들을 깨워서 떡국을 끓여 먹이고 있었다. 출국 전날 친정서 진공포장기로 포장해 온 멸치와 다시마, 그리고 친정엄마가 만들어준 떡국용 육수 간장을 넣어 끓여냈다. 식탁이 없어 종이 박스를 뒤집어 상을 차려냈다. 찬 독일 집 바닥에 박스를 뒤집어 놓고 아이들과 떡국을 먹고 있자니 기가 막혔다. 오늘은 또 무엇으로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야 하나. 국제 학교는 겨울방학 중이었고 아이들의 국제학교 등교는 일주일 정도 남았다. 등교하게 될 첫 날도 두렵지만 하릴없이 일주일을 보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공기마저도 낯선 그 순간은 그저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지는 것이었는데 내게 맘의 여유라곤 눈곱만큼도 없었다.


벨이 또 울린다. 보나 마나 S다.


사실 아이들은 지난 이틀 내내 S와 어울려 놀았다. S는 아무것도 없는 우리 집이 신기하다며 빈 집을 재미있어했다. 같은 아파트이니 구조가 같은데 짐이 하나도 없으니 넓고 좋다고 했다. 내 눈에 S는 그 엄마의 성격처럼 다정하고 명랑하게만 느껴졌다. 그때까지는 말이다.

집에 아이들 장난감도 TV도 없으니 S집에 아이 셋이 어울려 노는 시간도 많았다. S는 한 명이고 우리 아이들은 둘이니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S집에 올라가 보았다. 우리 집과 같은 아파트라고는 믿기 힘들었다. 물론 우리 아이들이 올라가서 어지름에 일조한 바도 있을 터이니 내가 S 집의 상태를 비난하면 안 될 것이다. 하나 선뜻 들어오라고 이야기하는 S엄마의 말을 듣고 그 집에 발을 디딘 순간 나는 후회했다. 그 집에 들어가기를 말이다.

입구 방은 S가 한창 꽂혀 있는 사극 놀이를 한다고 한복이란 한복은 다 꺼내서 작은 입구 방을 채우고 있다. 넓은 마루는 독일 레고인 플레이 모빌 조각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마루와 방 사이의 복도에는 아이들이 가지고 논 책들이 잔뜩 바닥에 떨어져 있다. 생각 같아서는 아이들을 모두 내 집으로 내려 보내고, 그 집을 싹 치웠으면 내 속이 시원하겠다 싶었다. 그런데 웃으며 기분 좋게 나에게 말을 거는 S엄마의 얼굴을 본 순간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애들이 너무 잘 놀아요. 방학 내내 심심해해서 놀아주니라 힘들었는데, 저희 S가 얼마나 신나 하는지 몰라요."

S는 외로웠다. S 엄마도 외로웠다. 나를 마트에 데려다주고 기뻐하던 S엄마의 표정이 나는 이제 이해가 되었다. S의 현재는 나의 미래일까? 집에 갇혀서 또래보다 어린 한인 아이들과 노느라 방학을 보내는 S가 우리 아이들의 미래일까? 구멍가게 같은 한인 마트에서 코스트코만큼 잔뜩 장을 보고, 사온 냉동 어묵과 포장김치로 상을 차린다. 이 숲 동네에서는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고 , 주재 기간 내내 나의 생활영역은 이 숲마을이 되는 그런 삶.

나는 S가 싫었다. S 엄마도 싫었다. 내가 처음 만난 한인, 나에게 처음으로 도움을 준 사람, 앞으로도 계속 얼굴 맞대고 살아야 하는 이웃이 그녀다. 이틀 만에 나는 그녀와 그녀의 딸이 싫어졌다.

배은망덕한 호박씨.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내가 부끄럽다. 경쾌하게 시작한 숲마을 차차차 1편을 후회하고 있다. 왜 나는 그녀를 떠 울렸으며 그녀의 이야기를 시작해서 이 불편한 나를 세상에 기록으로 남기고 있는가? 그 누구도 시키지 않았으나 나는 그날의 나와 마주하고 있다.



S는 포기하지 않고 여러 번 벨을 누른다.

잠금쇠는 열고 걸쇠는 걸어두어 문을 반만 연다. S에게 내 얼굴이 보일 만큼만 연다.

" 오늘은 토요일이야. 주말에는 좀 안 왔으면 좋겠어, S야. 아줌마도 좀 쉬어야 해."

어린이인 S에게는 돌려 말하지 않는 것이 더 낫다. S가 이해하려면 상처가 될 수 있을지언정 알아듣게 이야기해야 한다. 그러니 난 오지 말라고 직접적으로 말한다.

그때 S의 엄마는 S를 말리려고 계단을 반쯤 내려와 있었다. 그리고 S를 향해 내가 하는 말을 그녀는 들을 수 있는 정도의 거리에 서있었다고 한다. 만약 S엄마가 거기 있는 줄 알았더라면 나는 S에게 어떻게 말했을까?

내 마음의 문은 열린 문틈만큼도 열려 있지 않았다.

주재원이 아니던 나는 한국에 두고 왔다. 난 이제 주재원이다. 좁고 구질구질한 나의 한국 집, 그리고 서울서 제일 싼 동네, 폐차시키고 온 낡은 스펙트라, 그것들은 모두 지워버리고 싶은 나의 과거다.

그러니 독일에서의 내 삶은 완전히 새로운 시작이다. 말 그대로 갇힌 삶을 살고 있는 듯해 보이는 S의 가족처럼 살기 싫다.


여기 남편에게 차를 빨리 구해야겠다고 전화를 한 호박씨가 있다. 친절한 나의 첫 이웃을 보고 진절머리를 치는 차가운 이가 바로 나다. 더 이상 다가오지 말라며 문을 잠근다. 코 앞에서 문을 닫아 버린 이에게 도움을 받는 일은 너무 뻔뻔하니 그녀에겐 더 이상 도움을 받지도 주지도 안으리라 마음먹는다. 그렇기 위해선 내 차가 필요하다. 도움 따윈 필요 없는 완벽한 나, S에게 문을 열어 주지 않아도 될 만큼 잘난 내가 될 터이다. 여기 독일에서는 말이다.


주말 내내 오지 않은 S는 며칠이 지나도 내려오지 않았다. 아이들을 데리고 걸어서 갈 수 있는 Edeka슈퍼를 갔다 온 나는 과자를 들고 S의 집에 아이들과 올라갔다. 며칠을 내려오지 않으니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 며칠 바쁘셨나 봐요? "

" 저 지난 토요일에 저희 딸 내려갔을 때 그 뒤에 서 있었어요. 저희 딸한테 하는 이야기 다 들었어요. "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리고 마음속 한편에서는 안도가 차올랐다. 나만 그녀를 싫어하는 게 아니다. 이제 그녀도 나를 싫어한다. 나에게 거리두기를 할 것이다.

나는 정중히 사과를 했다. 사실은 새벽에 S가 내려왔었고 시차 적응이 안 돼서 많이 피곤했었노라고 이야기했다. 거짓말이다. 새빨간 거짓말. 나는 끝까지 그녀의 딸에게 핑계를 댄다.

그녀는 새벽에까지 딸이 내려갔는지 몰랐었다며 도로 사과를 했다. 그리고 나를 이해한다며 아이를 주의시키겠다고 한다. 나는 여전히 그녀가 싫다. 엉망진창으로 어질러져 있는 그녀의 집처럼 아이를 방임하며 그녀가 싫다. 나는 아이 S가 한 실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리고 엉망진창으로 아이를 키우고 있는 S도 한심하다.

" 걸쇠를 잠그고 문을 반만 여시니까 저희 애가 많이 속상했데요."

S의 말일까? S 엄마의 말일까?


반만 열린 문, 반은 닫힌 관계들은 주재 생활 내내 나를 괴롭혔고, S의 엄마를 괴롭혔다. 좁은 주재원 사회, 타국에서의 갇힌 한인 관계들 속에서 거리두기는 어려운 일이다. 어떤 날은 너무나 외로워서 한국말을 하는 누구나를 붙잡고 돌아가고 싶다고 하는 날이 있는가 하면, 그 말을 하자마자 돌아서서 내 속을 보여준 그 말을 후회하는 날들이었다. 내가 뱉은 그 말이 한인 사이를 떠돌다 나에게 돌아오는 날들이 있음을 깨닫는 순간부터 말이다.

활짝 열리지 않은 문을 통해서 상대방의 아름다운 정원만을 바라보고 싶은 간사한 마음, 이것은 나만의 것은 아니라고 위로해본다. S엄마도 결국 거리두기가 안 되는 우리들의 관계 속에서 나에게 진저리를 치는 그런 사건들이 있었다. S 엄마는 나보다 2년 정도 먼저 귀임을 했는데 귀임 발령과 이사 준비, 한국으로의 귀국 과정 속에서 나는 S엄마의 나를 향한 냉랭함을 느꼈으니까 말이다. 그녀는 한국으로 떠나고는 다시는 연락하지 않았다. 우연히 그녀가 떠나고 난 후 우리 집 우편함으로 들어온 그녀의 우편으로 그녀에게 톡을 보낸 날이었다.

" 저흰 다신 독일 갈 일 없으니 우편 오는 것들은 신경 쓰지 말아 주세요."

한국에서 들려오는 그녀의 말은 살얼음처럼 차가운, 전에는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음색이었다. 나만 그녀를 싫어한 것이 아니라 그녀도 나에 대해 알면 알수록 싫었다고 해두자. 부디.....


우린 반만 여는 사이여야 했다. 적당한 거리를 두어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아름다운 숲마을의 나의 독일 집은 그림처럼 고요하고 평화로운 곳이다. 그 속에는 이기적이고 거짓말을 해대는 호박씨가 산다. 이 글이 이렇게 마무리되는 데에 사흘이 걸렸다. 부끄러워 되돌아보기 싫은 2015년 1월 첫째 주의 이야기는 드디어 끝이 났다. 사흘 동안 정말 쉽지 않았다고 고백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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