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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고향

- 핼러윈보다는 귀곡 산장이지

by 호박씨

10대 초반의 유럽 애들이 좋아하는 문화 중 하나가 컬트 물이다. KiKa , 독일표 EBS 채널의 방영 시간대가 유아 시청시간에서 지나면 뱀파이어나 같은 복장과 생김새를 한 틴에이져들이 우르르 나오는 만화가 방영되곤 한다. 아이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내 눈엔 미학적으로 맘에 안 든다. 만화뿐 아니라 팬시, 서적도 이런 중세 고딕풍의 패션을 한 캐릭터들을 종종 발견할 수 있다.

이건 당최 누가 살까 싶지만 5년 내내 도처에서 발견했었으니, 독일 젊은애들에게는 꽤나 인기 있는 것으로 생각해보겠다. 그런데 이런 스타일의 공포가 나는 적응이 안 된다. 코스튬을 입을 날이 많은 국제 학교에서도 내내 나는 공포물을 즐기는 이 분위기를 불편해하는 편이었다.


나에게 익숙한 공포는 여름날에 보는 전설의 고향이다. 응당 귀신이란 흰 옷쯤을 입어야 하며, 칠칠치 못하게 피를 묻히기보다는 머리를 풀어헤쳐 얼굴을 좀 가려야 한다. 이 귀신이 등장하는 주변 공기는 온도와 습도가 높아야 한다. 전설의 고향은 한여름에 한다. 공포물은 더운 날을 서늘하게 해야 제 맛이다. 여름날 할머니나 엄마 등 뒤에서 보는 공포가 나에겐 진짜 공포다.

우리 딸에게 공포물은 겨울 숲이었다. 강마르고 매서운 바람이 부는 그런 추위가 아니라 손끝, 발끝이 시려 뼛속으로 한기가 파고드는 유럽의 추위가 서린 숲이다. 오랫동안 딸아이는 숲을 싫어했다. 그날의 기억 때문이다.


2015년 1월 1일. 지구 반대편으로 오는 비행기에서 뜬눈으로 잠 한숨을 안 잔 5살의 꼬마 아이는 시차 적응이 뭐냐며 밤 비행기로 독일에 도착하자마자 컨디션이 좋다. 집 안에 발자국 하나 내딛는 순간 사람 온기가 열흘이나 없어 얼음장처럼 차가운 기운이 온몸으로 퍼지는 곳이 지금부터 우리 집이랜다. 이 집은 하얗고 아무것도 없다. 엄마가 이제부터 여기가 우리 집이라고 하니 그런가 보다 하지만, 너무나 춥다.

꼬마의 몸보다 더 큰 이민 가방 안에서는 이불이 나온다. 이제 겨우 7시이지만 졸음이 살살 밀려온다. 마루에 이불을 깔고 엄마와 오빠 사이에 자리 잡으려 파고들어 본다. 내 가족 안에서 비로소 온기를 느낀다. 모든 것이 낯선 이곳에 오직 익숙한 것은 가족뿐이다.


일어나 보니 엄마가 떡국을 끓여 준다. 꿀맛이다. 식탁이 없어 마루에 종이 상자를 뒤집어서 내 식탁으로 만들어주었는데 쓸만하네. 새로운 식탁이야. 떡국은 그래서 더 꿀맛인가 보다. 먹고 나니 아빠가 동네 탐방을 나갈 차지를 한다. 꼬마는 진핑크색 엘사 잠옷 위에 잠바를 껴입고 아빠를 따라나선다. 다른 식구들도 다들 아빠의 뒤를 따라나선다. 아빠는 사뭇 기분이 좋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집을 나서는 꼬마의 아빠는 발걸음이 가볍다.

" 이 집은 아빠가 출장으로 여러 번 와본 곳이야. 저 호텔은 아빠가 출장 때 늘 지내던 호텔이야."

아빠에겐 낯선 공간이 아니구나. 그래서 아빠는 우리의 대장이 되어 집 주변을 둘러봐준다. 집 주변을 가볍게 둘러보여준 아빠는 안개가 자욱이 낀 집 뒤쪽 큰길로 향한다. 오르막길이라 오르기 싫다. 아니 사실은 자욱한 안개 사이로 보이는 컴컴한 숲이 싫다. 왜 아빠는 저 어두운 곳으로 향해 가는 거야?

" 아빠, 무서워."

" 뭐가 무서워? 하나도 안 무서운데. 왜 무서워? "

왜 무섭냐고 물어봐도 설명할 수 없다. 꼬마는 그냥 무섭기만 하다. 무서운 이유를 물으면서도 오르막을 오르는 아빠 때문에 이유를 말하기는 더 힘들다. 꼬마의 엄마와 오빠는 안 무서운가 보다. 두리번거리며 아빠의 뒤를 따르니 말이다. 아침 안개는 얼마나 짙었는지 한 치 앞도 안 보인다. 안개 뒤로는 시커먼 빌딩 숲처럼 뾰족한 나무들이 어슴프레 보인다. 나무들은 얼마나 많은지 푸르다 못해 검기까지 하다.

아빠가 숲 사이로 난 오솔길로 들어간다.

" 싫어! 무서워!"

꼬마는 엄마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제야 꼬마의 엄마, 호박씨가 걸음을 멈추고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아이는 온몸으로 무섭다고 표현하고 있었다. 입은 일자로 굳게 닫혀 있고 꽉 잡은 손은 어찌나 단단한지 아이 힘이라고 느껴지지 않을 정도다. 힘껏 호박씨의 팔을 잡아 끈다. 호박씨가 당겨질 정도로 말이다.


그날 딸아이의 손을 잡고 숲으로 향하는 오솔길 입구에서 숲을 들여다보았다. 숲은 사람의 기운이라고는 전혀 느낄 수 없는 그런 원시림 같은 냄새를 하고 있다. 들이키는 공기가 얼마나 찼는지 콧구멍을 지나 기관지, 내 폐 속까지 원시의 공기로 가득 채워졌다. 나는 헨젤과 그레텔을 떠올렸다. 딸아이의 표정이 그레텔이었으니까 말이다. 아마 그날 내 손에 만약 헨젤과 그레텔이 있었다면, 그래서 책을 낭독했었더라면 아마 딸아이에겐 평생 잊지 못할 메타버스적 경험으로 기억됐을 것이라 믿는다. 달빛에 반짝이는 흰 조약돌이 아니라면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그런 숲은 바로 딸 앞에 펼쳐져 있었으니까 말이다.


딸아이의 공포를 공감하지 못하는 남편은 결국 오솔길 속으로 우리를 조금 더 데리고 들어갔다. 숲 속으로 조금만 더 올라가면 하우스들이 있다. 독일의 숲은 조림을 관리하는 산림관리차와 대형 원목 운반용 컨테이너 차가 드나들 수 있도록 숲길이 잘 닦여져 있기 때문에 숲 속에 있는 집들을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다. 숲의 어느 정도까지는 주택을 짓는 것이 허가되어있어 차량이 다닐 수 있는 길을 갖춘 단독주택단지들을 숲 입구에서 종종 발견할 수 있다. 이 오솔길의 초입에도 집이 한채 있다. 나는 그 후로 5년 동안 매일 산책을 하면서 그 집을 지나쳤으나 첫날 그레텔이 된 딸아이의 손을 잡고 그 집을 보았을 때는 딱 귀곡 산장이 따로 없었다. 하얀 한복을 입고 머리를 풀어헤친 한국 귀신이 이 안개를 헤치고 걸어 나온다고 해도 아마 자연스러운 풍광이다 여겼을 것이다.


핼러윈이라 지하철 안에 조커와 할리퀸 코스프레를 한 젊은 커플이 재잘거리며 서 있다. 5살에 내 손을 꼭 잡고 있던 그 꼬마는 이제 저 할리퀸 아가씨 만한 12살의 소녀다.

" Did you see the Joker? Wow. 진짜 할리퀸 같아, 엄마. 분장 엄청 잘했다."

소녀에겐 조커와 할리퀸에 대한 두려움은 없다. 핼러윈이니 더 무섭게 분장해야 더 제대로다. 오빠와 재잘거리며 조커의 리얼함을 칭찬하는 소녀.

그럼에도 소녀는 아직도 숲은 좋아하지 않는다. 산도 좋아하고 숲도 좋아하고 걷기는 더 좋아하는 호박씨 때문에 매일 미도산을 오르지만 어둑어둑한 가을의 17시, 아직 미도산의 가로등이 들어오지 않은 시간이면 산 입구에서 멈칫 거리는 아이다. 아마 컴컴한 숲의 원시 향이 좋아지는 날이 오려면 시간이 더 필요한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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