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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약국집 딸들

- 호박씨의 롤모델

by 호박씨

"거기도 사람 사는 데야. 이런 건 뭐하러 가져가."

2014년 12월의 마지막 날, 독일로 가져갈 이민가방 앞에 약을 한 아름 내려놓시는 아버지에게 내가 소리친다. 원체 표정이 잘 안 드러나는 아빠의 얼굴에 실망한 기색이 보이지만 난 애써 모른 척한다.

못되게 덧붙이기까지 한다.

" 약 선진국인 거 아빠가 더 잘 알잖아?"


S대 약대를 나와 당시 업계 1위의 제약회사 D를 한 번에 입사한 나의 아버지는 집안의 자랑이었다. 엄마는 아들 같은 큰 딸인 나에게 아빠 닮았다고 주문처럼 말해댔다. 아빠 닮아서 S대 갈 것이라고 말하지 않아도 어린 나는 다 알아듣고 있었다. 나는 아빠와 똑같은 길을 갈 것이라고, 공부도 잘하고 좋은 회사에 취직할 것이라는 신탁을 받은 아이나 된 듯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여겼다.

아마 한국에서 포카리스웨트와 데자와를 가장 먼저 먹은 어린이는 나일 것이다. 신제품이라고 가져온 이 신통방통한 음료수들은 나만을 위해서 아빠가 만든 것 같았다. 약을 만드는 회사라고 하더니 이렇게 세상에 없던 맛도 만들어내는 우리 아빠가 너무나 멋있다.


그러던 어느 밤, 엄마는 흐느껴 운다. 대구에 연고도 없는데 어떻게 가냐며 아빠에게 소리 지른다. 아빠가 담당하던 생산 라인에는 멸균 및 소독 기계가 있었는데 아빠의 대학 동창이자 옆팀 동료가 부탁을 하여 아빠는 그 기계를 잠시 빌려주면서 사고가 생긴다. 동창이 오염된 소독 기계를 돌려주신 탓에 아빠의 생산 라인이 모두 오염되고 만다. 그리고 그 과실은 모두 아빠의 몫으로 돌아가 아빠는 그에 대한 문책으로 논공 단지 ( 지금은 대구광역시지만 그땐 달성군이었다.)에 위치한 D사의 협력사로 발령이 난다. 그야말로 귀양이었다.

아빠는 10여 년 전 나를 모셔갔던 회사가 나를 버릴 리 없고, 나를 다시 서울로 부를 것이다고 굳게 믿었다. 그래서 대구로는 절대 가지 않겠다는 엄마를 설득하여 우리 가족은 모두 대구로 가게 된다.


그때부터였나 보다. 믿음직스럽던 남편은 대기업에서 찬밥이다. S 대만 나오면 뭘 하는가? 사회생활에는 그런 공부 따윈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엄마는 스트레스에 못 이겨 이런 말들을 내뱉었다. 나의 멋있는 아빠는 이제 실패한 인생인가? 그는 무능한 사람인가? 나의 롤모델은 끝없이 추락하고 있었다.

4년이 지나도 회사는 아빠를 서울로 부르지 않았다. 되돌이켜 보면 나의 대구 생활은 서울 촌놈인 내겐 새로운 경험이었다. 하지만, 그 시간 동안 엄마는 공부가 뒤쳐질까, 귀양 온 남편이 서울을 포기하면 어쩌나 늘 불안해했기에 나는 마치 대구를 좋아하면 안 될 것 같은 죄책감 같은 것이 있었다. 대구 우리 집 앞 전문대를 가리키며 여기 살면 이 전문대나 가게 될 거라며 그 학교 주변으로는 얼씬도 하지 말라고 했다.


그래서 우린 서울로 돌아온다. 아빠는 약국을 개업하신다. 약국의 이름은 내 이름을 따서 지었다. 이제 나의 롤모델이 화려하게 부활한 것이라 여길 수 있겠으나, 전혀 아니다. 엄마가 약국을 개업한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엄마는 회사 생활을 망친 아빠는 손님 다룰 줄도 모르는 사람이니 우리가 부자가 되려면 본인이 직접 나서야겠다고 한다.

엄마와 아빠는 그날부터 아침 7시 출근 밤 10시 퇴근이었으며, 엄마는 새벽 5시에 일어나 그날의 아침식사, 나와 동생의 도시락, 남편과의 점심, 저녁을 다 준비했다. 아빠는 약국 카운터 뒤 조그만 공간에서 쉼 없이 담배를 피워대셨다. 배우자와 좁은 공간에서 같이 일한다는 사실, 이제 막 중학생이 된 나와 동생에 대한 책임감도 그에겐 무거웠을 테지.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를 괴롭힌 것은 실패로 마무리된 그의 첫 번째 사회생활이 아녔을까? 이제 마흔이 넘은 나는 마흔 언저리의 그 젊은 날에 자신의 업을 새로 시작하며 불안감에 떨었을 아버지를 생각하다.

나는 오랫동안 아빠가 무능한 사람이라고, 사회적으로 실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한순간에 벌어진 사고와 누명으로 가장 힘들었을 사람은 아빠였지만, 어린 내 맘속엔 아빠에게 드릴 위로와 희망은 없었다. 아빠처럼 될 거야 라던 딸은 아빠처럼 실패한 인생을 살까 봐 두려운 아이로 자라났다.


" 일단, 다 가져갈게. 가방에 자리 있어."

미안한 마음에 나는 주섬주섬 트렁크에 아빠가 챙겨준 약을 다 꾸려 넣는다. 그 약들은 컨테이너가 도착하기 전, 짐 하나 없이 살던 우리 가족을 지켜주었다. 새로 주재 나오는 이웃이나 귀임 이사를 하는 이들에게 소화제, 해열제등을 종류 별로 챙겨서 주었다. 워낙 넉넉하게 받아왔기 때문이었다. 이 약들을 가지고 있으면 짐 없는 이 황망한 때에 건강할 수 있다며 건네주었다.

" 약은 생각도 못했는데, 어쩜 이렇게 배려심이 깊으세요? "

늘 나의 마음은 따끔따끔하다. 내가 배려심이 깊은 것이 아니라 아빠가 나를 넘치게 챙겨준 것들이기 때문이다. 약을 가지고 있으니 약 먹을 일이 안 생기더라며, 호박씨의 넘치는 지혜와 센스에 대한 칭찬이 쏟아질 때마다 나는 이민 가방 앞의 아빠를 생각했다.

아빠는 비행기를 타지 못한다. 나는 5년 동안 독일에서 아빠를 기다렸다. 역사와 문화와 외국어를 사랑하는 지적인 나의 아버지는 세계 여행에 대한 다큐나 역사 소설을 읽으며 유럽을 동경하셨지만, 약국은 하루도 문 닫을 수 없다며 오지 않으셨다. 제발 한 번만 용기 내어 타고 오시라 말하진 않고, 오셨으면 좋겠다고 전화를 드리면, '약국 하루라도 문 닫으면 안 돼. 손님들이 얼마나 불평하는데.' 라며 딱 잘라 못 간다 하신다. 아쉽지만 사정이 그런 거라며 아빠의 비행기 공포를 모르는 척했다.


" 택배 받으면 전화해라. "

코로나 양성이라니 부랴부랴 약을 또 산더미 같이 보내신다. 보건소 전화가 많아서 전화를 받지 못하니 카톡으로 빨리 너희 집 주소를 불러보라고 하신다. 누구도 나가지도 들어오지도 못하는 나의 집 앞에 새벽부터 아빠의 마음이 와있다. 상자 가득히 말이다.

" 아프지 않으면 된 거야. 증상 심하지 않아도 보내준 약 다 먹어라."

택배 잘 받았다 하니 무뚝뚝하니 말씀하신다. 아빠는 코로나라는 무게에 지지 않는다. 그는 다시 내 롤모델이다. 앞으로도 죽 그럴 것이다. 코로나에 , 삶에 지지 않고 매일 같은 일을 할 것이다. 아빠처럼 말이다. 묵묵히 내가 필요한 자리에서 나의 할 일을 한다. 한결같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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