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다로운 입맛이다. 어디밖에 나가서 뭔가 먹을 수 없는 시간이 와버렸다. 원래도 먹는 거 챙기는 데에 본인 삶을 다 바치는 엄마와 시어머니와 여적 살아온 탓이라 먼 독일에서 힘들 때, 공황 발작이 나서 아무것도 먹을 수 없을 때 내게 떠오르는 건 그녀들이 해줬던 음식이었다. 생각나는 음식들이 나만을 위해서 차려진 것은 아니었다. 가족들 중에 한 명이여서 먹게 되었거나, 그 음식 해내는 거 돕니라 신물이 날 지경이었던 적도 많았다. 이거 먹으면 살 것 같다 싶은 그 음식들은 '나'를 위해서 차려진 게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차려진 경우가 전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각이 난다. 살고 싶은 맛이다. 세상에 한 두 대 정도가 아니라 늘씬하게 흠씬 두들겨 맞고 못 일어나겠다고 투정을 부리고 싶은 날이 있다. 나란 사람은 말이야 이렇게 힘들면 안 된다고, 내가 누군 줄 알고 이래 라며 그냥 이 자리에서 이 모든 걸 마무리하고 싶다는 철딱서니 없는 소리가 마음 저 바닥에 치밀어 오른다. 부모가 되지 않았더라면, 난 지금쯤 혼자 징징 거리거나, 베개를 부여잡고 울거나, 방에 누워 일주일씩 잠만 자며 잠수를 탔을 것이다. 인내를 왜 해야 하는데 하며 배 째란 소리를 하기엔 이미 엄마가 되어버려 날 바라보는 눈들이 서슬 퍼렇게 내 곁을 지키고 있다.
"새우튀김 먹고 싶다."
" 봄동 무침, 묵은지 김치찜... 또.... 쑥버무리."
식구들이야 뭘 먹고 싶든가 말든가 나 먹고 싶은 거만 생각하고, 장 봐서 해 먹고 싶다. 이제 차마 나이 든 그녀들에게 사는 게 왜 이러냐면서 알은체 할 수 없다. 입을 띠는 순간, 후회가 밀려올게 뻔하다. 80이 넘은 70이 넘은 그녀들이 밟아온 여정이 읽히기 때문이다. 그녀들이 완벽하게 한 점의 실수도 없이 살아온 이들이었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않다. 그녀들로 생채기 입은 적이 많아, 허술한 그녀들을 수도 없이 봐왔기에 여정에 대해 입을 때는 순간 정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인간적임을 싫어하는 자, 그게 나다.
한도 없이 퍼주는 스타일이다. 순수하게 좋아해 줘서 고맙지만, 나와는 거리가 멀다. 이웃사촌이자 요새 나의 절친인 N의 걱정을 털어줘야헸다 싶어, N에게 제안을 했다. N은 감사하고 고마워했고, 감동도 했다. 그래서 만날 때면 자꾸 사준다. 먹을 걸 지속적으로 제공하는 그녀다. 그녀에겐 아무 잘못이 없다.
그저 N과 나는 달라도 한참 다를 뿐이다. N은 학군지에 살면서 초등학교 5학년, 3학년 아이들을 학원 하나 보내지 않는다. 남편도, 시부모님은 그녀와 많이 다르니 N에게 훈수를 둔다. 아이들을 위해서라는 허울로 N에게 본인들의 불안을 욱여넣는다. 듣기 괴롭고, 자신의 길을 가기 힘들다고 N이 넌지시 운을 띄운다. N은 고민 상담도 심각하게 하지 않는다. 나와 이야기를 하다, 툭 하고 꺼내놓는다. 남편이 밤마다 애들을 데리고 영어 문법을 가르친단다. 아이고야! 아이들에 도움을 청했다. 큰 아이는 부담스럽다고 거절, 작은 아이는 기꺼이 N의 아이들의 영어 선생님이 되겠다고 했다. 고맙다!
첫 수업 개시일. 그녀가 양손 가득 장을 봐서 나타났다. 사실 아이들이 수업을 하고 있는 도서관 맞은편 마트는 웬만하면 가지 않는다. 마트에서 다 튀겨서 파는 치킨을 먹고 속이 불편하고 배 아팠던 몇 년 전의 기억 때문이다. 식구들이 좋아하는 과일 퀄리티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싼 듯 싸지 않으면서 과일들의 모양새도 가격만 못하다. 일대에서 평당가 비싸기로 1,2위를 다투는 동네 마트 퀄리티는 기대 이하다.
떡! 떡은 집어 들 수가 없었다. 랩이 씌워진 떡들이 탄력 없이 물져서 쫀득함 하나 없다는 걸 안다. 레이저로 스캔하듯이 떡을 덮은 랩에 눌린 표면을 살피면 눌러보지 않아도 떡의 점도를 파악할 수 있다. 그렇게 손도 안대는 그 마트에서 손도 대지 않는 떡을 N이 사들고 왔다. 마트 주변 상가 거리에 떡집이 없어, 마트 안의 떡은 떨어질 날 없이 잘 팔려 종류도 다양하게 구색되어 있다. 도대체 저걸 누가 살까 했는데 N이 사 왔다. 그녀의 얼굴엔 고심해서 들고 온 흔적이 역력하다. 제일 좋아하는 것만 어떻게 알고 사 왔냐고 신나게 받아왔다. 그 무엇도 말하지 않는다. N을 아낀다. 그녀가 만들어가는 세상을 온 마음으로 응원하기 때문이다. 따스하게 세상을 바라보는 그녀의 순진한 에너지 속에서 나도 빠져 살았던 지가 한참이라, 그녀를 지켜주고 싶다.
그래서, 한 입을 베어 물어본다. 새벽 4시 맛이 없을 게 뻔함에도 주문을 걸어본다. 떡을 씌운 랩을 걷고 떡들에게 말을 건다. 니들은 맛있어야 한다. 자고로 떡이라 함은 이로 베어 물었을 때 늘어지지 말아야 할 것이다. 떡이라면 이가 쑥 들어가면 안 되고 견딜 힘을 가져야 한다. 쫄깃함의 탄성은 베어 물어지되, 함부로 들어올 수는 없다는 밀고 당김이 있어야 한다. 이로 끊기는 그 순간에도 떡은 저항해야 한다. 자고로 떡이라 함은 호락호락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맛없다. 1번 바람떡은 주문을 아무리 걸어도 소용없다. 쫄깃은 1도 없고, 말라 딱딱해져 버렸다. 2번 콩과 밤이 박힌 영양찰떡, 네가 마지막 희망이다. 부디 N의 간택을 받은 너라도 떡 본연의 자세를 가지고 있었으면 좋겠는데..... 질겅하다.
2개나 먹었다. 먹을만하다. 떡은 아니지만, 2개쯤 먹어줄 만하다. 이렇게 우리 집 식탁에 놓여있다간, 나 덕분에 입맛 기대치가 하늘을 찌르는 식구들의 외면을 받아 내일이 되기도 전에 쉬어버릴 예정이다. N의 실수가 완벽하진 않다는 증거로 글을 마무리하고 남은 찰떡 2개도 먹어치울 셈이다.
누군가는 학군지에서 학원하나 보내지 않고 사는 그녀를 나무랄 것이다. 누군가는 상대방에 대한 조건 없는 애정으로 상을 차리는 마음을 비웃을 것이다. 상을 차리는 간절함을 누군가는 알지 못하는 시간을 보내나 문득 깨달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모든 완벽한 실수들이 당신을 살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부끄러움에 한이 없어 잠 못 이루는 날이 올 수도 있다. 우역 물컹한 떡을 먹고 있는 오늘의 나처럼 말이다. 완벽하게 실수하고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만 같다.
부모님이 하시던 약국이 있던 동네는 당시의 뉴스를 떠들썩하게 만들던 강력 범죄가 벌어진 동네였다. 기초수급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이가 늘 진통제를 외상으로 사가던 그런 동네의 떡집 사장님은 엄마와 친구였고, 부모님 약국의 단골이었다. 딸이 독일을 간다고 하니, 떡을 잔뜩 해서 챙겨 줬던 떡집 사장님네 떡은 떡이 갖춰야 할 모든 것을 당연히 갖추고 있었는데, 서른 중반의 나는 그 떡은 당연하지 않다는 걸 알지 못했다. 학군지에 와서, 모두가 안다는 동네에 와서 떡의 모양새만 갖추고 있는 떡을 먹고사는 오늘은 완벽한 실수다. 이제야 뭐가 뭔지 물컹한 영양떡에 박힌 콩만큼 알아가나 보다.
사진: Unsplash의Caitlyn W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