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덕에 다이어트

사라진 입맛을 찾아라

by 호박씨

나의 다이어트 역사는 중3, 16세부터 시작된다. 약국 개업과 함께 일터로 나간 친정엄마는 음식 천재 전업주부 이셨다. 태어나서 피자라는 음식을 처음 먹어본 날, 엄마에게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을 먹어봤다 하니 그다음 날로 엄마는 엄마표 피자를 집에서 만들어낸다. 엄마는 그런 마법사 같은 전업주부였다. 반죽은 튀김가루를 되직하게 하여 도우를 대신하고, 오븐 대신에 프라이팬에 기름을 넉넉하게 두르고 소시지와 피망, 당근, 양파를 뿌리고 노란 서울 치즈를 얹어 낸 것이 엄마표 피자였다. 엄마가 해줬던 음식들을 다 열거할 수 있을까? 엄마는 요리를 창작 예술로 만드는 그런 탁월한 주부였다.


그런 그녀가 나와 동생을 두고 일터로 나가려니 그녀는 챙겨 먹이는 것을 늘 마음에 걸려했다. 그녀는 새벽같이 일어나 우리가 챙겨 먹을 끼니를 해뒀고 아버지와 퇴근하고 돌아오는 12시엔 항상 약국 옆에 새로 개점한 뚜레쥬르 빵을 바리바리 사 가지고 오곤 했다. 나는 늘 집에 있던 엄마의 빈자리를 그 빵으로 메꿔나갔던 것 같다. 엄마 또한 개업의 불안감을 먹는 것으로 해소했던 것 같다. 그 1년 동안 우리 모녀는 자정 언저리에 빵을 먹어치우며 서로를 그리워했던, 바쁘고 팍팍한 일상을 위로하고 함께 마무리했다.

그러니 살도 무럭무럭 함께 찌워갔다.


에어로빅이며 탁구 같은 스포츠도 즐기던 주부였던 엄마는 약국 판매원으로 변신하는 통에 운동은커녕 산책할 시간조차 없었다. 나는 나대로 고생하시는 부모님을 기쁘게 하는 일이란 먹고 공부하는 것뿐이라 여겼다.

그렇게 삼 년여를 지나고 나니 살은 살대로 찌고, 허리 통증이 왔으며 교복 외에 맞는 맞는 사복이 없을 지경이었다. 옷이나 허리 통증은 살 빼고 시간 지나면 해결될 문제였지만, 바닥을 친 내 자존감은 회복에 많은 시간이 걸렸다.


수능을 보자마자 발레를 전공하는 사촌 언니의 발레 연습에 함께했다. 언니는 저녁 6시 이후에는 물 한 모금을 안 먹고 2시간씩 아파트 관리실 지하의 에어로빅 장에서 구슬땀을 흘리며 기초 포즈 연습을 매일 하고 있었다. 나도 투입이다. 3월 대학교 입학 때까지 3개월을 했으니까, 하루도 안 빠지고 하다 보니까, 8킬로 정도가 빠졌다. 내 키 153에 최고점의 몸무게가 57킬로 정도였으니 그 정도면 사실 독하게 성공한 셈이었다.


대학에 가고 첫 고등학교 반창회를 나갔던 날이었다. 남녀 공학인 우리 반의 반창회를 굳이 나가 보았던 진짜 이유는 자존감 회복 또는 테스트였을 것이다. 나를 알아보는 이가 한 명도 없다. 남자애들 왈 늘 수업시간에만 깨있고, 쉬는 시간에는 엎드려 자는 내 얼굴을 본 적이 없다고 한다. 그 말인즉슨 , 너 진짜 예뻐졌다 또는 네가 이렇게 생긴 줄은 몰랐다 일 것 같았다.


그래서 마음을 먹었다. 더 빼야겠어. 그래, 어디 한번 죽기 살기로 빼보겠어.

그런데 요요가 온다. 내 몸이 정상이라는 증거다. 회복탄력성이란 건강한 내 몸이 가지는 정상적인 성질이라 하겠다.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 가려하는 것, 과거의 몸무게로 되돌아가려고 하는 것은 자연의 섭리다. 섭리를 거스르기 위해 나는 입맛이 떨어지는 짓이라면, 끼니를 거르는 짓이라면 뭐든 다했다.

안주는 안 먹고 술만 먹으니 속이 뒤집혀서 밥이 잘 안 먹힌다. 담배를 피우니 입맛이 떨어진다. 먹고 토하니 결국 속에 들어가는 것은 없다. 다이어트 한약도 먹어보았다. 붕대를 전신에 감고 원적외선을 쬐는 다이어트방도 돈 백 질러봤다. 학교가 있던 신촌에서 집으로 가는 버스가 있는 명동까지 10cm 자리 힐을 신고 걸어오기는 다반사였다. 학교에서 친구들과 뭐라도 좀 먹은 날은 죄책감에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탈 수가 없었다. 오늘이 지나기 전에 먹은 열량은 다 태워버릴 거야라는 생각이었다.


문제는 지극히 정상인 나의 몸이었다. 한창 때니 얼마나 맛있는 것이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고, 입고 싶은 것도 많은 때였는지. 마흔이 넘은 지금의 내가 그때의 나를 바라보면 삶의 생기가 넘쳐 뭘 먹어도 맛있던 그런 싱그러움이 가득 찬 봄 들판의 들풀이었다. 맥도널드 버거가 100원 행사를 하던 때였는데 신촌역에서 친구들과 만원 어치도 먹었던 그런 때였다. 그땐, 내 삶의 원기가 축복이라는 사실과 이것도 그저 한때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래서 스스로 몸을 망치고, 헤치면서 입맛을 꺾기 위해 몸에 해로운 짓이라면, 살을 뺄 수 있다면 뭐든지 했다.


외모 자존감과 사투를 10년째 벌이던 나에게 다른 인종의 시선이라는 것이 생긴다. 독일에 나가게 된 것이다. 살이 문제가 아니라 나의 생김새 자체가 이질적인 공간에 처해지자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도 변화가 생겼다. 그즈음에 읽었던 책이 나오미 울프의' 무엇이 아름다움을 강요하는가?"였다. 한국서 오는 출장자 편에 구한 그 책을 읽던 독일의 어느 저녁, 나는 지난 10년을 얼마나 멍청하게 나 자신을 대했는지에 대해서 깨달았다. 나 자신을 사랑해주자 마음먹었던 독일의 긴 밤이었다. 더 이상은 내 몸에 대한 오류 투성이의 개념으로 내 몸을 바라보지 말자 하던 날, 독일 집 거실 창 밖으로 새어 들어오는 먼 별빛을 멍하니 바라보던 날이었다. 후회막심, 말 그대로 헛된 시간 이였들이였다.


코로나 증상은 사람마다 다양한데 나의 경우는 목감기에서 몸살, 목쉼 그리고 지금은 냄새 못 맡기로 진행되고 있는 중이다. 그냥 냄새를 못 맡는다기 보다는 코라고 불리는 기관의 가장 깊숙한 곳이 마비가 된 기분이다. 후각이 거의 없다. 감각이 없다 보니 음식을 한참 씹어야 무슨 맛인지 알아진다. 냄새를 못 맡은 지 10일 넘으니 입맛이 다 사라져 버렸다. 뭘 입에 넣어도 맛이 느껴지질 않으니 입에 넣어야겠다는 생각이 안 들고, 넣어서 이로 씹는 작업이 노동이 되어 버린 상황이다.

다이어트가 절로 된다. 그토록 기다리던, 바로 입맛이 사라진 상황. 마흔이 넘어 전쟁 같은 코로나를 만나서야 이루어지는 일이었다. 입맛을 떨어뜨리겠다고 내가 나에게 했던 몹쓸 짓들이 우스워지는 상황이다. 브런치에 이리 기록을 남기니 이제 이보다 더 어리석은 짓을 반복하진 않을 듯싶다. 입맛이 좋을 때가 너의 한창때였던 거야. 호박씨. 인생의 가장 빛나는 순간은 항상 지금 이 순간인 것이고 말이야.


그나저나 코로나야, 자동으로 다이어트시켜줘서 좀 고맙다. 감사 인사는 해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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