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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박씨 Jun 05. 2024

오늘의 마음 날씨는 취업하길 잘함.

 오늘을 버티는구나 싶은 마음이 드는 날이 있다. 날씨처럼 마음은 시시각각으로 변한다. 잔뜩 찌푸린 날도 있는가 하면 실낱같은 해가 나는 날도 있다. 남들은 해가 쨍한 날은 다들 신나라 해서 나만 빼고 이 날씨와 결을 같이 하는 분위기로 바글거린다 싶은데 내 위에만 비구름이 잔뜩인 날도 있다. 

 오늘만 지나가보자 또는 1시간만 더 버텨보자 하는 마음이 먹어진다. 취업을 한 덕분이다. 만일 전처럼 주부로 집에 있었더라면, 나는 시간 부자에 스스로를 경영하는 자라는 허울에 빠져서 이렇게 집구석에서 이렇게 겁쟁이로 늙어 가겠구나 했을 것이다. 마치 나란 사람은 가만히 그 무엇도 하지 않아도 누군가 알아주겠거니, 돈도 많겠거니, 애들도 알아서 크겠거니, 남편은 새벽같이 출근해서 밤이 늦어서야 오겠거니 이런 태평한 마음으로 섬처럼 살았을 것이다.

 요새의 마음 날씨는 기후 위기의 오늘과 결을 함께 하는 것만 같다. 아슬아슬하고 위태롭지만 그런 덕분에 희망이 찬란하게 느껴지고 지푸라기 한 올이라도 나타나면 그리 고마울 수가 없다. 불행의 바구니 속에서 모래알 만한 행복을 찾으면 그 모래알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른다. 기를 쓰고 행복을 찾으려고 노력해야 하며, 최선을 다해 나를 칭찬해줘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고선 마음의 날씨를 다스릴 방법이 없다. 날씨에 두 손 두 발 다 들고, 감정에 휩쓸려 버리면 그 하루는, 그 ' 오늘'은 망한 거다. 

하루 종일 입으로 말할 일이 없는 날은 대체로 기운이 빠진다. 사고만 안쳤으면 좋겠다 싶을 정도로 이 작은 회사의 시스템이 낯설고 엉성하게 느껴지던 때도 있었다. 의욕은 가라앉혀야 하는데 잘하고 싶은 마음은 급하고 이 젊은 이들에게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욕심만 앞서던 때에 비하면 지금의 나는 대견한 편이다. 스스로를 칭찬하기에 익숙해져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만하면 이직도 가능할 것만 같다. 나에게 일거리를 주다니, 잔소리하는 엄마나 애정을 구걸하는 와이프가 아니라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 같은 지금의 회사에게 감사하고 고마운 감정이 지나쳤었다. 1년이 다가오니 이제야 나는 진정이 된다. 타인에게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욕심은 줄이고, 스스로를 사랑하고 다독여준다. 혼자 먹는 점심이 익숙해지고,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스크린만 향하는 회사에 대한 애정도 사그라들었다. 회사라는 조직, 남의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기보단 나로서 나를 본다. 고독과 친구하고, 혼자 있어도 미치지 않을 수 있다. 젊은이들과 일하게 되니 더 늙어지는 기분이다. 중년을 넘어 노년을 미리 맛보는 기분이다. 



 아이들에게 부디부디 되는 데까지 공부해서 하고 싶은 분야의 최고로 좋은 스승이 있는 곳을 찾아가라 했다. 좋은 학교에 가야 배울 시스템을 경험해 볼 수 있다고 늘 말했다. 오늘의 나는 과연 좋은 스승이 있는 최고의 학교에 위치하냐면 전혀 그렇진 않다. 정말 되는 데로 이곳에 왔고, 조건에서 선택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동아줄을 잡았기에 썩었는지 끊어질 예정인지 따윈 생각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난 살아가고 있다. 

 뭐 같이 일해서, 뭐 같이 취급받아도 200만 원이 안 되는 파트타임의 월급을 쪼개 연금저축을 들고, 주택청약을 넣고, 가계부를 쓴다. 40의 한국여성이 어떻게 세상에 비치는지 오늘이라는 거울이 고스란히 보여준다. 거울에 정면으로 맞닥뜨리고 있으니, 쓰디쓴 이 경험은 고생이라는 라벨이 달린 학교다. 것도 꽤나 괜찮은 학교. 왜냐면 매일 내게 깨달음을 주고 있으니 말이다. 출근하기 싫은 나를 일으켜 세우고, 하고 싶지 않은 일 앞에 나를 끌어다 앉힌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선명하게 떠오른다. 

 부디 아이들을 대하는 마음으로 스스로를 대하길 빈다고 주변 아줌마들에게 늘 이야기하고 다녔었다. 내 새끼는 고생 없는 미래를 살라며 아이들 앞의 카펫이 되어 주는 엄마, 그중 최고봉이 나였다. 이건 아니다 싶다. 

 내 글의 원천은 고생이다. 내 딴에는 엄청난 고생이 키보드 위를 달리는 손가락을 만들어낸다. 그러니, 부디 내 새끼들도 고생하길 빌어야 한다. 거지 같은 선생, 별로인 시스템에 부딪혀 결핍을 마주해야 한다. 선생이 너무 별로라 내가 학생이지만 선생도 해야겠다 마음먹어야 한다. 엄마가 바빠서 밥을 차려 주지 못하니 배고픈 내가 밥 차려 먹어야지 하고 씩씩해질 기회를 주어야 한다. 넘어지고 아프고 잠 이루지 못하는 날들을 통해 어떻게 하면 스스로를 사랑하고 격려해 주고 다독일지 배울 수 있었다. 

 퇴근길은 공황장애 후유증의 길이다. 만성피로는 명민한 나의 감수성과 완벽하려고 노력한 온 하루의 신경 씀에서 온다. 눈이 빠질 듯하고 팔다리에 힘이 없으며 오르막 끝의 아파트까지 다다르는 길이 그야말로 십자가 길이다. 매일 퇴근길을 오르며 지하철 앞에서 망설이던 나를 떠올린다. 매일 퇴근길에 오르며 바싹 마른 체 자기 방에 스스로를 가두었던 큰 아이를 생각한다. 매일 퇴근길에 오르며 집에 오기 싫다던 작은 아이의 울음소리를 재생한다. 

 불행 속에서 행복을 건져 올리는 중이다. 경력이음은 아프지만 할만하다. 아니, 해야만 했다. 



사진: UnsplashWolfgang Hasselma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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