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불행은 깨달음을 주고, 타인의 행운은 패배감을 안겨준다. S대 졸업이 79년생 여성에게 준 것이 뭘까 생각해 보면, 아무것도 없는 것만 같아 사실 학교를 다시 방문한 적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만나게 되었다. 재수를 한 78년생 2명과 79년생 2명이 만났다. 그 둘 중 1명은 20년 만에 만난 셈이었고, 나머지 둘 또한 3년 만의 만남이었다. 모이자마자 어제 만난 듯 우리를 찾아왔던 각종 불행과 갈등에 대한 썰을 풀었다.
6시 언양불고기 집을 시작으로 8시 이자카야의 정종까지 곁들여 목이 쉬도록 이야기를 나누고 나니 11시였다. 기말고사를 앞둔 두 아이가 있는 내 처지를 배려해 달라고 하니 흔쾌히 그들이 사는 곳까지 와주었기 망정이지 그들과의 중간지점에서 만난 더라면 자정을 넘겼을는지도 모르겠다. 핸드폰의 시간을 확인하지 않았고 시계를 들여다보지 않았다. 어제 만났던 듯 떠들어댔고, 지나간 시간을 모두 다 풀어내고야 말 기세가 끝까지 기어졌다.
우리의 저녁과 술상엔 스스로에게 닥쳤던 병과 인간관계의 고통스러움뿐만 아니라 그 시절 우리와 함께 했던 이들의 불행도 안주로 올라왔다. 나는 연락 닿는 이가 전무하니, 그들에게 물어물어 그 시절 동기와 97학번 선배들에 대한 기억을 소환했다. 이름 석자를 더듬어 기억해야 했다. 연애사로 얽혔던 관계도 시간이 걸려 떠올렸다.
치열하게 살아가는 중년들의 다양한 모습들이 펼쳐졌다. 살아남지 못한 자에 대해 가장 먼저 떠올려진다. 그땐 우리와 한 공간에서 같은 숨을 내쉬고 들이마시며 지냈었는데, 더 이상 지구에서 함께 살아가지 않는 이가 있다. 사고와 돌연사로 중년의 문턱에 다다르자마자 세상을 떠난 이들, 그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진흙탕에서 개같이 살아도 현생을 사는 게 낫다는 고리타분한 옛말을 생각했다. 마음 한편에선 나는 살아남았기에, 죽은 이들에 대해서 이들과 떠들어댈 수 있다는 게 다행이다 했다.
결혼과 이혼, 자녀 그리고 친정과 시댁과의 관계들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이제 막 성인이 되었을 때 만났던 우리는 매일을 함께 했고 느슨하게 서로에게 기댔었다. 그런 느슨한 관계에서 답을 찾지 못하고 늘 외로웠던 기억이 났다. 그들과 지금 함께 하는 술상도 갑자기 원망스러워졌다. 20대의 그 지극한 불행함을 그들은 알고 있었을까? 혹시 나는 전혀 알지 못하더라도 20대의 그녀들은 수없이 많은 눈물을 흘렸던 건 아닐까? 함께 있어도 외로우니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나았다. 그래야만 끝없는 불행함이 해결될 것이라고 믿었으니까. 오답도 그런 오답이 없다.
학교를 다닐 때에도 연애에는 관심이 없었던 Y는 여전히 드문 연애를 했고 남편도 아이도 없다. Y의 얼굴은 여전히 맑다. 내 눈엔 그리 뵌다. Y는 암을 이겨내고 30대 중반에 커리어를 싹 바꿨고 이름까지 바꿨다. 대차게만 느껴지는 그녀가 내게 이렇게 말한다.
" 답은 정해져 있는 게 아니더라고. 인생의 답은 내가 만들어가는 거더라."
결혼도 육아도 없이 Y는 깨달음을 얻었다. Y와 말이 통한다. 나도 고통 끝에 소소한 깨달음을 얻었나 보다. Y의 불행이 줄줄이 나온다. 엄마와 장녀와의 감정 분리는 어렵고 힘든 과정이다. 그녀의 불행이 식탁에 올라오자 다들 열을 내어 자신의 불행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각자 나름의 깨달음으로 자신의 경험을 마무리한다. 끄덕거리는 대화가 주는 기쁨이 폭발하는 현장이다.
불임으로 여전히 힘들어하는 친구 L은 친정엄마 이야기가 나오자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L이 엄마와의 관계를 풀어내기 시작한다는 건 이제 해결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입을 모아
"우리는 너무 착했다."
고 결론을 내렸다. 구속하고 판단하는 엄마 덕분에 착하고 말 잘 듣는 한국의 딸로 모범생이라는 카테고리에 스스로를 가두고 살아왔노라고 깨닫는다. 공동의 결론이 나왔지만 우린 이 자리에서 기뻐할 뿐 다시 엄마 앞에 서서 한 없이 작아지고 고군분투할 것이다.
그럼에도 이 날의 대화가 우리에겐 순수한 기쁨이다. 20년 만에 만났는데 그 누구에게도 하지 않은 불행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나도 그런 경험이 있었노라고, 나도 너만큼이나 괴로웠었노라고 이야기한다.
불행을 공유한다는 건, 기쁨이다. 그렇다면 행복의 공유는 어떨까?
장장 5시간을 이야기했지만, 우린 서로에 대해서 칭찬하기에 인색하다. 결국 나의 재취업은 대기업에 다니는 L이 보면 터무니없다. 미국서 아직도 독박으로 아이들을 돌보니라 10년째 고생인 H가 미국에서 아이들이 일궈낸 성과를 언급하면 부러움에 차마 내 입에선 칭찬이 나오지 않는다. 우리의 대화엔 긍정이 부족하다. 많이 부족하다.
두 친구를 보내고 Y와 둘이 남게 되었다. Y가 주차한 공용주차장으로 향하면서 Y는 내게 더 유명해져서 돌아오겠다고 한다.
" 됐거든."
이미 넌 충분히 나의 자랑이야. 스스로에게 하고 싶은 말을 Y를 앞에 두고 실컷 해주었다. 호박씨, 나는 충분히 잘하고 있다. 사랑한다, 호박씨. 스스로에게 안아주고 토닥거려 주는 요새의 습관을 Y에게 그대로 적용시켜 돌려주었다.
우린 행복하다. 불행을 나누지 않아도 살아서 눈을 마주칠 수 있으니 행복하다. 아프지 않아 내 발로 그녀를 만나러 올 수 있으니 기쁘다. 타인과 함께라는 행복을 누릴 수 있으니 나는 행복한 게 분명하다. 불행만이 깨달음을 주는 게 아니다. 딱 한 사람, 시간이 흘렀어도 여전히 지구에 살아남아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그 사람이 깨달음을 준다. 사람은 어찌나 책과 같은지. 그렇고 보니 이번주는 책을 읽지 않고 있다. 책 보다 사람 읽기가 더 재미난 한 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