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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박씨 Jun 22. 2024

늙은 여자가 된다는 건

늙은 여자가 된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궁금하다. 노인이 된다는 건 우울해짐의 동의어가 아닐까 상상했었다. 노인이라는 사실을 받아 들일 수 없다는 감정만 남을 거라는 추측만으로도 엄마에 대한 동정심은 충분히 샘솟았다. 

  친정아버지는 엄마가 부지런히 밥 해먹인 덕에 체력이 짱짱하셔서 열성 유튜브 구독자가 되었다. 정치 유튜브 채널들의 알고리즘이 아빠의 친구가 되었고, 딸과사위를 만나면 세상이 골로 간다고 말하기 바쁜 아버지는 목소리가 우렁차시다. 엉뚱하지만 아빠는 하고 싶은 일,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건수를 잘 찾는다. 

 반면 엄마는 목소리가 작아졌다. 디저트 카페 창업이 수포로 돌아가고 친정집으로 다시 들어간 동생을 보면서 자꾸만 스스로를 탓한다. 잘못 키웠나 보다. 내가 잘 못 길렀나 보다. 엄마의 컨디션이 떨어지면,  요즘처럼 지구 온난화가 극성이면 노인인 엄마의 자존감은 나락으로 떨어진다. 

 같은 시간에 전화를 하면 엄마의 컨디션 변화를 잘 느낄 수 있다. 출근의 기회, 다시 세상으로 나와 일할 수 있게 된 행운은 이럴 때 제 값을 발휘한다. 자발적이든 강제적이든 뜨고 지는 해처럼 항상성을 유지하는 것, 마치 자연처럼 변화하면서도 한결 같이 존재하는 이 모든 것엔 의미가 있다. 자리를 지킨다라는 말이 얼마나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말인지 이젠 알고도 남는다. 1년을 채워 출근한 스스로를 기특해하는 만큼이나 일정한 시간에 출퇴근을 하고 같은 시간에 식사와 휴식시간을 갖는 타임테이블의 모든 노동자는 기실 존경 받고도 남을 일이다. 존경할만한 나, 이렇게 의미 짓고 나면 이 귀한 경험을 목소리가 자꾸만 줄어드는 불쌍한 노인일지 모르는 우리 엄마와 나누고 싶어진다. 

 긴 경력 단절을 이은 나이든 신입 사원이라 나의 일엔 재미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고 의미 없어 보이기도 하고 또 어떤 날은 실수 투성이기도 하다. 내 이야기 하는 대신에 엄마가 차리는 오늘의 식단을 묻는다. 12시 10분, 엄마는 약국 조제실 뒤쪽에 딸린 방 한 구석의 좁은 싱크에서 재료를 다듬고 있다. 이야기를 좀 나누다 보면 엄마의 칼질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렇게 엄마의 점심 준비 시간을 전화로 함께 하는 셈이다. 엄마의 음성에 여유가 생기면 이제 가스렌지를 켰다는 뜻이다. 요리가 거의 마무리 되어간다. 


마흔이 넘은 둘째 딸이 혼자 남았을 때 살아갈 방법을 알려줘야겠다는 게 오늘 엄마의 고민이다. 엄마의 고민은 나의 고민과 크게 다르지 않다. 엄마는 노인이지만, 그와 동시에 여전히 엄마다. 40대의 큰 딸이 자식을 바라보는 방법과 같다. 홀로서기에 성공하는 법, 남들이 가장 하기 싫어하는 것도 기꺼이 하는 법, 해처럼 달처럼 자연처럼 똑같은 일상을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서 엄마는 알려주고 싶어 한다. 내가 아이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리하여 엄마와 나는 자식들에게 오해를 사지 않으면서 방향을 잡아줄 방법으로 머리를 싸맨다. 엄마의 푸념은 대체로 ' 이 나이 먹어서까지 이런 고민을 해야 하냐.'이지만, 나의 대답은 일관되게 '어떤 고민이든 나이와는 상관없다.'이다. 내가 처한 자리도 엄마이고 엄마가 처한 자리도 엄마다. 자식이 자식답고 부모가 부모 다뤄야 하는데 우린 누구나 자식인 동시에 부모이기에 이 고민은 평생을 이어간다. 헤어지거나 죽거나 병들어 아플지라도 우린 자식이고 부모다. 배꼽 없이 하늘에서 떨어진 존재는 인간이 아니다. 

 엄마를 노인으로 살게 하지 않는 역할을 동생이 하고 있다. 엄마 옆을 지키면서 계속 엄마를 엄마이게 만든다. 동생이 집에 다시 들어오고 엄마는 또 전처럼 동생 반찬 따로 아버지 반찬 따로 해가면서 아침 또한 부엌에서 부지런히 떨었다고 한다. 그런 동생이 엄마가 해둔 반찬을 먹지 않는다고 속상하다는 게 이번 주 엄마의 주제다. 내가 엄마에게 내린 처방은 '동생 밥은 하지 마라.'이다. 엄마 또한 이에 적극 찬성하여 늘 친정 냉장고와 식탁에 가득하던 동생을 위한 음식들은 이번 주엔 전혀 없는 중이다. 

 엄마가 진짜 노인이 되어 더 이상 밥을 할 수 없는 시간이 다가온다. 90살까지 건강하게 지내시다가 100살에 돌아가신 외할머니를 보면 엄마가 밥을 할 수 없을 때가 오늘 내일 지금 당장은 아닐 테다. 그럼에도 엄마는 밥 챙김의 독립이 마음의 독립, 진짜 둘째 딸이 홀로서기를 성공하는 뜻으로 여긴다. 결혼할 것 같지 않은 딸이, 커리어라고 딱히 말할 게 없는 나이 든 여자가 살 맛 나게 살아갔으면 하는 바램으로 엄마로서 해야 할 특단의 조치를 취하고 있는 셈이다. 

 50분이라는 시간 동안 엄마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10대의 아이들을 대하는 방법에 대한 답이 자꾸 나온다. 신기한 일이다. 하루라도 빨리 이들을 세상 밖에 내보내야지. 좀 더 불편함을 느끼게끔 대해야지 하고 마음먹게 된다. 불편하게 지내는 태도, 일부러 걷고, 부러 배달음식을 시키지 않으며 귀찮게 음식을 해대는 내 삶의 윤리를 아이들에게 전염시켜야겠다고 마음먹는다. 이만하면 나는 너무 잘 살고 있어서, 아이들도 늙음을 대함이 두렵지 않은 중년이 되길 비는 마음으로 아이들에게 자랑스럽게 나 자신을 보여주고 싶다. 

 기꺼이 50을 향해 가는 큰 딸에게 작은 딸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는 엄마가 자랑스럽다. 엄마는 노인이지만 노인이 아니다. 현역 엄마다. 그러니 내게 스스럼없이 엄마의 치부를 드러내 보인다. 이만하면 괜찮은 친구이고 멋진 모녀관계다. 노인과 매일 전화 상담이 가능한 나도 꽤 멋진 중년이다. 


사진: UnsplashBranislav Rod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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