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황 장애 시작은 관계의 단추가 잘못 끼워질 때부터다. 사랑하는 타인이 나에게 기대하는 바를 알아차리고 그 틀에 스스로를 끼워 맞추려고 하는 순간 우리는 자신을 잃고야 마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 사랑받을 수 없다면, 특히 가족이라 여기는 공동체로부터 거부당한다면 당신은 이제 세상 전체로부터 거부당했다고 느낀다. 모든 것이 불안하기 시작한다. 나에게 전부인 그 사람, 내겐 온 우주 같은 가족이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세상이 날 떠밀어낸다고 생각하게 되기 마련이다.
불안이 당신을 집어삼키는 순간, 당신은 단 한 걸음도 앞으로 내딛을 수 없다. 밥도 먹을 수 없고, 심지어는 생각도 하기 힘들다. 공황에서의 시간은 아프게 교훈을 준다. 스스로를 정확히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찰나의 시간에도 수 없이 많은 판단을 하면서 살고 있다. 셀 수 없이 많은 결정들이 지금의 나를 이룬다. 결정을 내릴 수 없다면, 그 어떤 결정에도 자신이 없다면 '나'라는 존재 자체는 사라진다.
판단이라는 알갱이들이 나라는 주머니를 차곡차곡 채우고 있다. 감정이라는 비가 내려 알갱이들을 끈끈하게 연결해 준다고 생각해 보자. '나'라는 주머니 안에 채 몇 개 들어있지도 않은 판단은 감정이라도 비 내려야 차돌처럼 단단해질 터이다. 우울증에 공황장애를 겪는 이가 짜낼 수 있는 감정은 무색의 눈물 한 방울뿐이다. 그러니 주머니는 누군가의 의미 없는 숨 한 번에도 흩어져 사라져 버릴 수 있다.
친정 식구들의 대다수는 공황장애와 불안증을 안고 산다. 잠을 덜 자고 적게 먹으며 변화에 민감하다. 늘 뭔가를 두려워한다. 나 또한 그들처럼 아프다고 고백하니 그들 모두 도망가버렸다. 너무 두려워 어찌할 바를 몰랐다고 하는 편이 맞겠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 시댁식구들, 아픈 나를 보며 질겁하는 친정 식구들, 모두들 덕분에 마음먹은 바가 있었다. 나의 불안과 친구가 되기로 한 것이다. 주변사람들뿐이겠는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우리들 대부분은 불안에 떨며 산다. 주변을 둘러보며 친구보단 조금 더 행복한지, 이웃보단 조금 더 잘 사는지, SNS를 살피며 이미지의 주인공과 조금은 비슷한지 끝도 없이 비교한다. 불안이 일상이라 불안이 삶을 집어삼킨 셈이다.
큰 아이가 현충일 연휴 내내 잔기침과 코막힘의 감기로 침대에 누워 있곤 했다. 오늘, 지금 당장 공부 하고 있지 않는 저 아이의 인생은 엉망진창으로 흘러가버리면 어쩌나 싶다. 아니면 작년 여름처럼 영원히 일어나지 않고 침대 붙박이로 생활하면 어쩌지? 불안이 나를 집어삼켜 불안 괴물이 되어버리기 직전이었다. 생리 주기와도 겹쳐 생리 전전날부터는 아이를 쳐다보기만 해도 눈시울이 붉어졌다. 두려움이 이른 더위처럼 현충일 연휴를 덮쳐버렸다.
남편과 둘이 청계산을 가고, 미뤄두었던 베란다를 치우며 불안 괴물이 되지 않고 아이만을 쳐다보고 있지 않으려고 몸을 계속 움직였다. 결국 아이 감기를 고스란히 가져왔다. 여름 감기는 개도 안 걸린다지만 불안보단 기꺼이 감기에 걸리겠다.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아이 감기 옮았어." 했더니 엄마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진다. " 애를 그만 좀 사랑해!"라는 말을 거듭한다. 위로 한 마디가 필요했는데, 엄마는 불안해서 위로할 여유가 없다. 그러다 말겠지 라며 여유롭고 호기롭게 무엇이든 지나간다고 태평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엄마의 불안을 읽어진다. 감기가 낫는 기분이다. 이 여름 감기는 불안이 나를 집어삼키지 않게 도와준 고마운 놈이다. 한바탕 몸살을 앓고 나면 나를 찾아온 이 감기만큼 면역력이 생긴다. 불안에 녹다운 당해 틀어진 아이와의 관계도 오늘만큼 회복되는 날이 오듯, 불안과의 싸움에서 펀치를 조금씩 조금씩 날려본다. 쨉! 쨉! 땀이 나고 열이 내린다. 감정의 비가 내린다. 작은 성취와 승리, 극복의 뿌듯함이 비처럼 내린다.
사진: Unsplash의Anna Heck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