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아이들의 코로나 격리 기간이 끝나고 만 5일 만에 아버님이 돌아가셨다. 아버님은 우리의 격리 기간도 맞추셨나 보다 싶었다. 5일 만에 장례식장을 지키며 상주의 배우자로, 아들은 작은 상주로 이 사람 저 사람을 만나자니 굉장히 조심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부산으로 내려가는 KTX에서 한참을 검색을 했다. 중성화된 코로나 바이러스가 체내에 있어서 검사를 하면 양성으로 나오며, 코로나 항체는 코로나 확진자의 대부분이 가진다고만 쓰여있다. 이것 또한 블로거와 기사에 나온 내용일 뿐, 우리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한 이 서프라이즈의 주인공에 대해서는 어떤 정확한 통계자료도 없다. 보건소는 격리 기간 끝났으니 외출 가능하다고 했고, 격리 기간 동안의 집안에서 나온 쓰레기는 격리 해제후 3일 뒤에 대량 소독약을 분사하여 폐기하라는 지침에 따랐다. 법적으로, 지침상으로야 뭘 어기거나 한 행동은 하나도 없는데 이 찝찝한 기분은 뭘까? 그 누구도 내 몸속에 코로나는 이제 더 이상 힘이 없으니 이젠 자유로워도 된다고 확답해주지 않는 듯한 느낌이다.
장례식장에 들어서자 내일모레가 입시인 조카는 밥을 따로 먹여야겠다고 하신다. 처음엔 섭섭했다. 그러나 나도 자신하지 못하는 것을, 나도 코로나라는 이름에 무거웠던 것을 잊지 않고 있기에 큰 시험 앞두고 조심하는 마음 이해하자 마음먹어본다.
어머니는 상을 치르시니라 정신없으실 텐데도 그 와중에 자꾸 나에게 다가와 물으신다. 어디가 아프진 않냐고, 그 무서운 것을 걸려가지고 얼마나 고생했냐고 눈물 지으신다. 상이 끝나면 바로 백신을 맞으러 가라고 하신다. 어머니에게 항체가 생겨서 이제 백신 안 맞아도 될 것 같다는 말씀을 드렸지만, 미덥지 않아 하시는 표정이다. 공황장애 때문에 무서운 것도 많아지고, 주재 생활을 마치고 돌아와서 진통제 링거를 맞았다가 쇼크가 온 경험도 있고, 각종 알레르기가 있는 나이기에 백신은 최대한 미루고 있었다. 어머니는 백신을 안 맞아서 걸린 것이라며 백신을 200% 신뢰하시는 눈치다.
지인분은 상갓집에 오시더니 식사하신다고 마스크를 벗고 계시다가 내가 백신을 맞지 않은 상태에서 코로나에 걸렸던 것이라고 말씀드리니 슬쩍 마스크를 도로 쓰신다. 물론 나는 내내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반응은 제각각이며 나는 이 반응들을 잘 소화시킬 만큼 단단해졌다. 2년 전 처음 코로나가 극성일 때에는 나는 아이들을 보며 나도 아이들도 외국인이며 우리가 위치하는 내 나라라 이름 지어진 이곳이 많이 낯설었다.
" 돌아다니면서 자꾸 밥 먹고, 술 먹고, 조심도 안 하니까 걸리는 거 아니겠어요? "
비슷한 시기에 한국으로 귀임한 아이 친구 엄마가 하는 말에 솔직히 나는 반기를 들었다. 후에 내가 코로나에 걸릴 줄을 알았었나 보다. 나는 안 돌아다녔고, 계속 돌아서면 밥, 돌아서면 밥, 일명 돌밥을 만 2년 동안 하고 살았으며, 술집 근처에는 얼씬도 안 했으며, 조심은 금메달 급으로 하고 살아왔다. 그럼에도 나에겐 코로나가 불쑥 찾아왔다.
" 어디서 어떻게 걸릴 줄 모르는데 우리가 그 얼굴도 모르는 사람을 그렇게 말할 수는 없는 거죠."
공자왈 맹자왈 뻔한 바른 소리라 하겠지만, 정말 그러했다. 주변에서 점점 코로나 걸리는 이들이 늘어갈 때에도, 어떤 공황장애 환자가 격리 시설에서 목을 맸다는 기사를 볼 때에도 마음이 따끔히 아려왔다. 모두가 함께하는 이 전쟁에 테슬라 CEO 쯤이나 돼서 잠깐 우주 어딘가로 달나라 여행이라도 갈 수 있으면 모를까, 지구촌에 살고 있는 사람들 중에 이 전쟁 상황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조심이라는 말 쉽게 꺼내기 힘들다. 2년이란 시간을 조심을 계속하면서 사는 게 가능할까? 이 조심이라는 것도 모두를 아우르는 일괄적인 규칙인데, 이 규칙에 맞아 들어가게 우리를 재단해야 하는 상황에는 개인차가 있을 것이다. 그 개인차가 누군가에게는 목숨을 걸 만큼 큰 일이기도 한 것을, 우리는 조물주가 아니기에 가늠할 수는 없는 일이다.
3월에 내 마음은 외국인이었다. 마치 지나가기만 해도 뚫어질 듯 나를 바라보는 유럽인들의 시선에 익숙해져 내가 서있는 이 자리도 낯설기 그지없었다. 뉴스에서 연일 언급하는, 코로나에 걸리는 이들에 대한 편견 어린 시선들은 나에게 날 선 말들로 속을 후벼 팠다. 그래서 만일 나나 우리 가족이 코로나에 걸린다면, 이 동네에서 살 수 없을 것 같고, 남편의 회사에서 일하기 힘들 것 같다는 막연한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작은 아이가 먼저 양성으로 검사 결과가 나오고 그다음 날 큰 아이와 내가 코로나 확진이 되자, 위로와 걱정이 쏟아져 나왔다. 작은 아이의 같은 반 친구들은 작은 아이와 줌으로 격리 시간을 지켜주었다. 확진 당일날부터 온종일 비대면 대화의 꽃이 피었으며, 격리 시설이 호텔급인 곳도 있다며 학원도 안 가고 공부도 안 하고 호텔 밥 먹게 됐다는 사실을 아이에게 자꾸자꾸 일깨워 주었다. 작은 아이는 울다 웃다를 반복하며 혈색을 찾아갔다.
피아노 학원을 확진 전 두 아이가 두 번씩이나 피아노 수업에 참석해서 피아노 학원 원장님께 어찌 말씀을 드려야 하나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차마 통화하긴 너무나 죄송스러워서 보건소에서 연락이 가실 것이라고 문자만 보내드렸는데, 원장님은 며칠 후 마음을 담아 답장하셨다.
" 선생님들도 다 검사 결과 음성입니다. 저희는 계속 수업하고 있고요. 학원 걱정 마시고, 얼른 나아서 아이들 수업 참여하길 바라고 있겠습니다. "
처음 연락이 왔던 작은 아이의 방과 후 수업 선생님께도 전화가 왔다.
" 제가 더 조심했었어했는데 죄송합니다. "
선생님이 죄송하실 일은 아니라는 통화를 하면서 나의 음성이 나의 뇌를 깨운다. 그래. 이건 누구도 죄송할 일은 아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그 어느 누구도 나를 탓하지 않는다. 나와 내 아이를 아는 이들 모두 그저 많이 아프지 않고 일상으로 돌아와 달라고만 했다. 친정엄마와 시어머니는 온통 걱정으로 연일 전화를 하셨다. 심지어, 이 두 분의 걱정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그래서 이 두 어머니들에겐 오늘 전화를 한 통씩 넣어본다.
" 격리 지원금이 일인당 30여만 원이 나오네요. 1월에 코로나 지원금 받으면 소고기 사드리게요."
두 분의 음색이 달라진다.
" 많이 주네? "
돈이 좋구나. 아니다. 것보다 지원금을 신청하러 슬슬 동사무소에 걸어갔다 온 나의 현상태에 대한 두 분의 안도가 더 좋구나. 돈 주고 살 수 없는 것도 세상엔 너무나 많으니 말이다. 위로, 격려, 공감, 이웃, 가족 이 중에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다. 코로나가 더 이상 핫하지 않은 이유는 이제 우리는 이 전쟁통 속에서 소중한 것은 무엇인지를 깨쳐가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