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싫은 날이 있다. 말 한마디에 기뻐지고, 말 한마디에 슬퍼지니 종종 이런 날이 있다. 감정이 폭포처럼 쏟아 내려서 아무 말 없이 혼자인 듯 지내는 이런 날은 싫은 일 투성이다. 나라면 저렇게 하지 않을 텐데라며 내일 또 아니 잠시 후에 또 대해야 하는 사람을 속으로 실컷 나무란다. 나무라기. 내가 참 잘하는 일이다. 허물을 들추어내고, 겉으로는 아무 말하지 않고 주는 건 좋고 받는 건 싫으며 주고 싶지 않은 것을 달라고 하는 이를 증오하는 나.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나를 맞닥뜨릴 때마다 당황스럽다.
가만히 나를 들여다보면 타인의 감정을 얻어와서 인가보다. 한 사발 물에 잉크 한 방울이 번져나가듯 옆에 있는 이의 마음이 내게로 번져든다. 내게 지나온 과거를 털어놓는 이가 많다. 힘든 표정이 읽혀서 얼굴을 마주하기가 싫은 순간이 많은 날이 제일 버겁다. 생각을 읽는 초능력자도 아닌데 왜 저런 말을 하고 왜 저런 행동을 하는지 알 것 같아 더 속상하다. 속상함을 삭이지 못해 받아줄 수 있는 내게 말을 집어던진다. 하루에 내가 받을 수 있는 감정의 개수는 대략 두 개 정도인데 대여섯 개가 쏟아지는 날엔 마지막에 이르러선 되돌려 보내고야 만다.
꼭 내가 돕지 않아도 어떤 일들은 절로 풀려나간다. 내가 돕지 않아야 스스로 풀어나가는 경우도 있다. 나란 사람이 이 삶의 드라마에서 악역이어서 주인공인 타인이 나를 이기고 나란 역경을 딛게 되면서 히어로로 탄생할 수도 있는 것인데 굳이 내가 주인공이고 내가 선한 역할이고자 한다. 거스르지 않는 늘 좋은 날만 있는 인생은 없는 법인데, 내겐 늘 좋기만 하진 않는 삶이 낯설다.
두 아이의 기말고사와 사무실 이사가 겹쳐 하루종일 졸리고 뒷목이 뻐근하다. 자고 일어나도 온몸이 다 아프다. 모든 게 내 몫은 아니며, 내가 뒷전을 지고 있으면 누군가가 도움을 줄 기회를 제공하는 법이기도 한데 나란 인간은 그게 안 되는 게다. 기어코 히어로가 되어야 직성에 풀리나 보다.
적당히 할 수 있는 만큼만 한다는 큰 아이를 보면서 지금보다 만약 내가 훨씬 나약하고 아프다면 어떨까 생각해 본다. 큰 아이 삶에 배경으로 단단한 지붕이 아닌 불기만 해도 날아갈 듯한 초가지붕이 있다면 아이는 바람에 지붕이 날아가지 않도록 단단히 붙들어 매며 부지런을 떨었을 것이다. 생물학 전공 쪽으로 나아가고 싶다고 하니 아이의 눈을 마주할 기회가 있을 때 부탁을 했었다. 네가 엄마의 신경성 화장실 행을 고칠 수 있는 신약을 개발했으면 좋겠다며 앓는 소리를 했었다. 아이가 간절한 마음을 먹도록 하려면 얼마나 내가 불편한지, 얼마나 내가 고통스러운지를 더 표현하고 티 내야 하는 게 아닐까? 참고 견디면서 일을 하고 아이의 학원비를 마련하면 나만 멋있는 사람이 되고 슬슬 공부하는 아이는 자동으로 악역을 맡게 되는 셈이다.
사무실 이사는 알아서 자체로 자기 짐을 옮기면 되는 게라 직원들에겐 짜장면 점심이라도 제공해야 하는 게 인지상정이다 싶었다. 짜장면은커녕 수고하셨다는 말조차도 서로 없었다. 그가 해야 할 일이지만, 대신 내가 하지 뭐 싶어 점심을 함께 먹는 직원들을 데리고 중국집으로 향했다. 탕수육은 내가 쏘겠다고 하니, 거절을 한다. 다 싫은 건 나만이 아닌 셈이다. 이 회사에서 와서 오늘이 싫어, 현실이 싫어 우울함에 빠진 이들을 보며 나라도 어떻게 해야겠다 싶었는데 오늘에서야 나는 그 무엇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멋있는 사람이 되고, 주연이 되려는 마음은 누구나에게 있는데 그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셈이다. 주연이 아니라면 제대로 악역이라도 해야겠다 싶다. 모든 게 정말 다 싫은 건 내가 아니라 그들일지 모른다. 아무것도 하기 싫었던 건 내가 아니라 아이였던 것처럼 말이다. 한 발 물러나 뜨겁고 차가운 무대장치가 되어야겠다. 이 삶이란 무대에서 혹독한 비바람이 되고 물 한 방울 없어 무섭도록 뜨거운 사막이 되어야겠다. 견디고 이겨 승리하는 주연은 나는 아닌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