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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박씨 Nov 28. 2024

어떤 글도 소중하다.

 이왕이면 글을 쓰고 싶었다. 어떤 글을 쓰게 되더라도 말이다. 아침마다 보게 되는 출근길 지하철 광고 중 **신용정보의 '떼인 글 받아들여요.'라는 광고를 보고도 카피라이터를 부러워했다.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광고글이든 시인인 동시에 유명 경제신문 기자가 쓰는 글이든 그 어떤 글도 내겐 사실 평등하다. 

눈 온 다음날은 세상이 온통 목소리로 가득하다. 눈이 내게 글을 써 보낸다. 이상하리만치 많이들 몰려왔다고 말한다. 지구는 더 이상 내가 기억하는 날씨가 아닐 것이라고 말한다. 출근길 가로등 기둥에 붙은 과외 전단지가 눈 온 다음날의 습기 가득한 바람에 나부낀다. 눅눅해진 종이가 간신히 붙어 있는 모양새다.  미국 유학도 다녀왔는데, 한국에서 영어 과외 한다는 누군가의 이야기가 전단지 글 속엔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 과외선생에게 과외를 받고, 영어성적이 향상되어 미국 유학을 갈 수 있게 되더라도 한국으로 돌아와 개인과외를 할 수 도 있다는 가능성을 알 수 있다. 

 경력을 잇는다면 이야기를 들어주고 이야기를 하는 그런 업을 하고 싶었다. 한창 회사가 힘들어 사활이 걸린 순간에 취업이 된 나에게 대표는 회사의 이야기를 꽤 많이 했다. 면접을 보다 브런치를 쓴다는 이력서의 한 줄을 본 그가 눈을 반짝이며 능력을 발휘하게 해 주겠다고 했던 순간을 1년이 넘게 지난 오늘도 어제처럼, 방금처럼 기억한다. 믿고 싶은 말을 믿는다. 우린 어떤 약속이 말뿐이더라도 그 순간만큼은 그 약속이 지켜져 꿈이 이루어질 날을 상상하고 달콤해한다. 



 내가 주로 하는 말은 "안녕하세요.****입니다."이다. 누군 재택근무로 누군 오늘 휴가고 누군 바로 바꿔줄 수도 있다고 그들의 요청에 답해준다. 나와 긴 이야기를 나눌 상대가 아주 드물게 전화를 걸면 사실 불평불만으로 가득할지언정 신이 난다.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어서 좋아 죽겠다. 타인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야말로 내겐 겐 맛있는 시간이다. 독일서 감질나게 보았던 한국 드라마도 이보다 덜 재미날 것이다. 불법 공유 사이트에서 한주를 목이 늘어지게 기다려 우리말 이야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었다. 지금의 나는 내게 자신의 이야기를 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셈이다. 

 주로 쓰는 글을 이메일이다. 때론 복잡하기도 때론 간단하기도 한 요청과 확인, 안내로 가득한 한 단락에 채 못 미치는 문장들로 구성되어 있다. 공을 들여 이메일을 쓴다. 몇 번을 고쳐 쓰고 내 글을 읽을 사람의 마음을 자꾸만 떠올린다. 이 단어라면 흡족해할까? 요 단어를 사용하면 나의 요청을 잘 들어줄까? 이렇게 쓰면 바로 답을 해주려나? 고민하면서 쓰다 보면 저 깊은 곳에서부터 흥이 차오른다. 글에 미친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입사한 지 1년이 채 안되어 마케팅 팀원이 퇴사를 했다. 얼마나 옆에서 침을 흘렸는지 모른다. 마케팅 담당으로 뽑은 인턴이 만일 지금의 그녀가 아니었다면 오늘까지도 나는 몹시 분해하고 있을 테다. 채용된 인턴을 잘 돌봐주는 게 경영지원이라는 내 업무의 입장에 충실하는 셈이니 매일 그녀를 데리고 점심을 먹었다. 그러면서 마케팅으로 이야기를 하고 글을 써 내려가가진 못해도 점심시간을 이야기로 채울 수 있었다. 서른에 못 미친 이 젊은이의 이야기에 풍덩 빠져들었다. 첫째와 같은 나이의 막내 동생에 대한 이야기도, 김포신도시 초창기에 입주해 나름 한가롭게 지냈던 그녀의 학창 시절을 들으며 혼자 어찌나 재미나했는지 모른다. 

두 번째 인턴이 오고는 이야기의 방향은 또 달라졌다. 사람이 늘었으니 기운이 더해졌고 이전회사 경력이 5년인 그녀가 회사 복지에 대한 불만과 낮은 급여에 대한 불평이 많아 처지가 같은 입장에서 내 이야기도 많이 했다. 혼자 책 보며 지냈던 점심시간 세월 1년과 언젠가는 더 받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으로 스스로를 달래는 출근길을 공유한다. 네 개의 눈동자가 나의 입을 바라볼 때는 신남이란 이루 말할 수 없다. 


결국, 이야기보따리가 되고 싶다는 나의 꿈은 유보 중이다. 글로 세상을 이롭게 하겠다던 내 꿈은 진행형이다. 

"엄마가 어떻게 세상을 바꾼다고 생각해?"

한창 삐딱선을 타던 지난달의 큰 아이가 내게 묻는다. 아이의 물음은 내가 매일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백기 들고 투항하라. 아이는 엄마는 허황된 꿈을 꾼다며, 엄마가 할 수 있는 건 없다고 했다. 쩝. 

그러거나 말거나 혼신의 힘을 다해 이메일을 쓴다. 단어를 고치고 문장을 다듬는다. 세상을 바꾸고 있다. 나의 목소리와 나의 글로 다정한 세상을 만들고 있다. 이야기를 들려주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데에 나의 오늘을 다 바치고 있다. 그러니, 이런 마음으로 누군가가 써 내려갈 글에 대해서 늘 손뼉 칠 준비가 되어있다. 폐간되어 나가는 잡지와 노벨문학상 뒤에 가려져 지쳐 나가는 중견 전업 작가들 그리고 듣기에 불편한 이야기를 하는 어느 누군가의 목소리가 다 소중하다. 어느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 

폭설에 갑자기 얼어붙을 듯한 공기로 베란다 식물들이 소리를 낸다. 축 늘어진 고무나무 이파리의 이야기가 내겐 소중하다. 출근하려다 말고 하나하나 화분들을 베란다에서 거실 안으로 들여놓는다. 이 산 것들의 목소리가 내겐 쩌렁쩌렁 들린다. 이야기, 이야기, 이야기! 눈이 이렇게 많이 오는 날은 온 세상이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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