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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귀를 맞춰나가는 법

by 호박씨

부부로 산다는 건 삶의 아귀를 맞추는 것이다. 결혼 적령기라고 하길래 또는 남들도 하니까 결혼한 지인들은 치열하게 이혼을 했다. 함께하는 괴로움, 나를 깎는 아픔을 참지 않겠다고 그들은 기꺼이 외쳐댔고, 행동으로 옮겼다. 결단을 내렸다. 남편과 내게도 이혼이라는 단어가 테이블 위에 올라온 날들이 있었다. 인생이 힘든데 그 이유가 나와 함께여서라고 했다. 나 또한 겨우 마흔 남짓에 이 사람과 함께 산지 스무 해를 채우지 못하고 매일을 이 사람과 함께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오늘도, 지금도 내게 닥친 이 외로움은 그와 함께 하기 때문이라 여긴다. 영혼인지 뇌의 작동원리인지 알 수는 없지만 피부를 찌르는 듯 불안함이 온몸을 감싸고 이 감정의 원인은 바로 남편이라고 생각이 든다. 함께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자라고 마음을 먹어본다. 죽을 만큼 고통스럽지도 않고, 죽을 만큼 힘든 것도 아닌데 저녁 식탁의 고요함이 괴로워 어쩔 줄을 모른다. 그는 아무 말 없이 혼자 내버려도라는 기운을 온몸으로 내뿜으며 하루를 보낸다. 작은 핸드폰 화면 속 유튜브로 하루를 온전히 보낸다. 침대에 누워 하루 종일 낡은 잠옷을 입고 오로지 핸드폰만 들여다본다. 그는 묻는 말에만 답을 할 뿐 한마디 말도 하지 않는다.

남편의 침묵이, 남편이 혼자서 안방 침대 처박히는 시간이 내겐 고통스럽지 짝이 없다. 힘을 내야지, 힘을 내야지 하며 스스로를 다독다독 거리지만 역부족이다. 그의 침묵으로부터 오는 고통 덕분에 오래간만에 글을 쓰게 된다. 뭔가를 보면서 이 고통을 잊기보다는 이 시간을 낱낱이 파헤쳐 가시와 살을 바르고 내 속의 상처를 발라내어버리면 고통이 사라진다. 외로움이 옅어진다. 실로 글을 써서 나를 들여다보는 일은 내게 남편과 한 공간에 있음을 가능하게 해주는 치료제다.

어떤 식으로든 남편과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진다면, 서로 조금씩 아주 서서히 맞아 들어간다. 늙어가기 때문이다. 살면서 나라는 존재가 그를 바꾼 것이 절반이라면, 나이 들어가 그 스스로 기운이 빠지고 변화해 감이 그를 바꾼 원인이다. 남편을 처음 만났던 서른 초반에서 이제 20년을 채워간다. 처음 만났을 때의 그를 생각하면 이만하면 억울한 면이 줄어들었다. 바라고 기대했다. 자의적으로 그가 이런 사람이 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목표 같은 게 존재했었다. 실제의 그와 상관없이 30년이란 세월을 살아가면서 나 혼자 키워온 이상향이었다. 그 이상향과 그는 전혀 일치할 리가 없는데 일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치하게 만들 수 있다고도 생각했다. 그 착각을 열심히 부셔가고 있다. 바라고 바라지 않으며 함께 해도 지극히 외로운 게 나란 인간이라는 걸 깨달아가는데 이렇게 긴 시간이 필요하다.

남편은 글을 쓰지 않으니, 글을 쓰듯 일을 하고, 내가 글을 바라보듯 일을 통해 자신을 바라본다. 함께여도 지극히 외롭다는 사실을 남편은 이미 알고 있을는지도 모른다. 화가 나면 어쩔 줄 몰라하고, 내겐 부당한 요구를 했으며, 사과할 줄을 몰라 술을 먹고 미안해하던 그 젊은 남편은 지금 여기엔 없다. 100명 중 70등에 가까운 아들의 성적표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다고, 별 일 아니라며 연신 유튜브를 보는 나이 든 그 또한 어리석기 짝이 없지만, 그래도 그 젊은 남편보다야 낫다. 여러모로 나은 편이다. 화에 못 이겨 나와 큰 아이에게 행사했던 폭력은 잊히질 않는다. 남편은 이제 더 이상 그런 폭력행 사는 없다. 오히려 스스로를 갉아먹고 자괴와 우울로 시간을 보낸다. 스스로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그를 보면 마치 나에게 그러한 듯해서 침대에 갇힌 그를 바라보는 일은 참으로 괴롭다.

남편을 향한 더 큰 이해와 배려를 해야 하는데, 나란 인간의 그릇을 키우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는 아들의 성적표에, 아이의 상태에 대해 생각하다 눈물짓고 불안해하는 나의 짐을 덜어줘야 할 배우자이지만, 아니기도 하다. 배우자는 이러이러해야 한다고 단정 짓는 건 오롯이 나의 기준이다. 그와 결혼하던 어리고 젊고 예쁜 여자애가 아니니 더 이상 그렇게 그에게 역할을 단정 짓지 않을 테다. 글을 쓸 수 있는 상태인 내가 그보다 훨씬 멀쩡하다.

"나 좀 도와줘."

"...."

" 유튜브 보지 말고 내 옆에 가만히 함께 해줘. 나 좀 도와줘. 너무 힘들어."

남편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힘들다고 도와달라고 했다. 그는 요구한 바를 들어주지 않고 아이에 대해서 말했다. 기대하고 바라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길로 가고 있으니 바르게 사는 것을 보여주는 수밖에 없지 않냐고 했다. 그렇게 말한 지가 24시간이 채 되지 않았는데 유튜브를 하루 종일 들여다보고 있다.

정확하고 분명하게 그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그는 들어주지 않는다. 그는 가만히 평정심을 유지하고 우는 내 옆에 있어줄 수 있는 사자의 심장을 가진 이가 아니다. 그러니, 그가 오늘은 그런 심장을 갖지 않았다고 해서 불평하거나 그와 이혼해야겠다거나, 그와 더 이상 같이 살 수 없겠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말로, 우는 행위로, 심지어는 글쓰기까지 동원해서 스스로를 달랠 도구가 있는 내가 그를 도외야한다. 남편이라면 이러이러해야 한다고, 남편이니까 그가 나를 도와야 한다고 정해두고 그를 바라보고 있다.

아귀를 맞춘다는 건 누군가를 깎고 깎아 맞붙을 수 있게 하는 시간과 정성이 들어간다. 누구를 얼마나 더 깎을지가 중요하진 않다. 더 무른 나무는 깎이고 깎여서 자취만 남아있을는지 모른다. 어떤 날은 단단한 나무를 서걱 잘라내어 버리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내가 어느 나무인지는 결혼 생활의 매일 속에서 그때 그때 다를 것이다. 먼저 사과하고 먼저 손해 보고, 그리고 불평과 탓하지 않는 나무가 된다는 건 억울한 일이다. 억울함을 감수하고, 내 선의를 선의로 그가 알아주는 않는 상황들의 연속이다. 그 또한 그 만이 간직하고 있는 이런 상황들에 대한 기억이 존재할 것이다. 이게 결혼이다. 누군가와 가족이 되어가는 과정의 한 중간이다. 부부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생각으로 온전히 사는 순가이 바로 지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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