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늦은 송년회가 아니었다. 계엄 이후 카카오톡으로 연신 카카오 메시지를 보내오는 아빠를 마주하기가 쉽지 않았다. 남편을 붙들고 유튜브 내용을 소리 높혀 이야기하는 장인 어른이 아니였으면 좋겠는데, 멋있는 장인어른이었으면 좋겠는데, 아버지의 현재는 그런 상태와는 거리가 한참 멀다. 보청기를 마련해 드렸음에도 불구하고 의사소통은 어렵다. 의견을 나누는게 불가능한 상태이시다. 소리를 높여서 본인의 정치 성향과 국제 정세, 나랏일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한다. 아버지의 불안을 우리에게 공유하기에 한껏 열을 올린다.
한국의 고등학교 내신은 1등급에서 9등급까지 나뉜다. 9등급이라는 게 있다는 걸, 100점 만점에 9점을 받을 수 있다는 걸 살면서 처음 알은 듯 하다. 아이의 성적은 내가 받은 성적이 아닌데, 나의 일인 양 9라는 숫자가 잠을 청하려고 누우면 떠오르고 밥을 먹으려고 하면 떠오른다. 머릿속에 문신이라고 새긴 거 마냥 12월 31일 숫자를 마주한 날로부터 오늘까지 5일째 함께 하고 있다.
100점 만점에 한 자리이 숫자인 기말고사 통합과학 성적이 눈을 감으면 떠오른다. 아이가 나 같은 상태가 아니라는 사실을 다행으로 여겨야할 지경이다. 나의 일인양, 나의 성적인양 결과를 두고 잠 못자고, 밥 못 먹는 지금의 상황을 오롯이 나만 겪고 있으니 다행이다 싶기까지 하다.
아들의 성적표는 내게 그 무엇도 바라지 말라고 말해준다. 이맘 때쯤 받았으면 좋겠는 싶은 성적과 내가 꿈꿨던 계획 이 둘 간의 상관관계가 없구나. 나의 바램과 아이의 삶은 일치하지 않는구나. 당연한 것을 모르고 살아왔음을 깨우쳐준다. 짊어지고 있는 불안은 아이의 몫이 아니라 내 몫임을 알게 되었다.
아버지가 내게 바라는 건 하고 싶지가 않다. 불안에 못이겨 하루 종일 유튜브를 보고 신년을 맞은 저녁 식사 자리에서 극우 유튜브의 목소리를 복기하는 아버지가 싫다.
나와 피를 나눈 이, 나를 나아준 이들은 내가 아니다. 그들을 위해 내 시간을 바쳐 도울 수는 있지만, 어떤 방법으로 얼마만큼 도와야 하는지는 한계가 늘 존재한다. 진지한 얼굴로 대통령의 탄핵을 반대하고 나라의 안위를 위해서 유튜브를 시청하는 건 다 다음 세대인 나의 아이들, 아버지의 손자와 손녀를 위한 일이라고 하신다. 나의 희생은 너희들을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식사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아버지의 말을 되새김질하지 않는 눈치다.
가만히 딱딱해진 아버지의 어깨를 감싸앉고 싶다. 아프거나 다치거나 죽은 이 하나 없이 2025년 1월의 어느 일요일 저녁 한데 모여서 소고기를 먹을 수 있는 행운을 누리고 있는 이유는 40년 동안 아버지가 아버지란 짐을 짊어지고 살아왔기 때문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시대착오적인 결단을 내리는 이 나라의 지도자가 우리의 식탁에 소고기를 올려줬을 리가 없다고 일러드리고 싶다. 지도자가 옳건 옳지 않건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다고 소리지르고 싶다. 어제 잠을 못 잔 건 9등급이 새겨진 아들의 성적표 때문이라고 아버지에게 기대고 의지하고 싶다.
딸아이를 붙들고 하나님이 이 나라를 보살펴 주셨다고 말하는 아버지 뒤로 아들이 이어폰을 끼고 소파에 누워 인스타그램을 들여다보고 있다. 참는다. 참고 또 참는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가족이 무얼 하고 있든 같은 공간에 누가 있는지 전혀 상관하지 않고 구워주는 고기 다 먹었으니 핸드폰 화면을 쳐다보고 있는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아들을 발견하고 할 수 있는 건 단 한 가지다. 침을 삼키고 입을 닫으며 말을 먹는다.
제 멋대로 자란 나무를 찾으면 탄성을 나온다. 나무가 위치하는 그 공간의 주인은 나무이며 어떤 모습으로 어떤 상태여도 나무는 존재함의 이유가 있다. 아버지와 아들을 바라보면서 나무 보듯, 물 보듯, 예쁘다고 생각하는 자연을 보듯 해야한다.
거친 나무 껍질을 만져본다.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늘 거친 표면을 문질러보고야만다. 나를 기분 좋게 하는 포근함과 따뜻함이라곤 찾아 볼 수 없는 메마름만이 느껴질 뿐이다. 생명의 기운을 느낄 수 없는 나무껍질을 보고도 아름답다고 생각하곤 한다. 그러니, 아빠도 큰 아이도 존재한다고 생각해야한다. 그냥 저러하다고 여겨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