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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게 기대기

by 호박씨

복이다. 내 복이다. 주변인들이, 회사나 가족이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할 수 있는 나이대와 성별, 업을 가진 사람들로 가득하다면 글을 한 글자도 쓰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책에서 길을 찾아야 하나, 답은 어디서 찾아야 하나 고민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경주마처럼 눈을 가려 앞만 보고 수로를 달려 나가듯 가족을 꾸려나가고 엄마가 되고 세상의 어른이 되어가는 이 시험에 정해진 답이 있다고 착각하기 살기 좋다. 손쉽고 간편하고 골치 하나 아프지 않은 기득권의 아늑함 속에서 어른이 되는 길과는 한참 동떨어진 채로 이 삶을 갈무리해 갔을는지도....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나와 비슷하다 싶은 사람은 없다. 매일 안부전화를 거는 친정엄마도 1시간 넘게 내게 엄마의 이야기, 40년 넘게 엄마와 함께 지내는 둘째 딸 이야기, 엄마의 남편에 대한 불만 등을 들으면서도 엄마와 하나처럼 느껴지진 않는다. 엄마가 나인 양, 엄마의 고통을 내가 해결해줘야 하는 양 마음먹었던 시절의 나는 없달까? 공감은 하되 합의는 하지 못하며, 온 힘을 다해 들어는 주되 진심으로 찬성해주지 않는 태도가 엄마와의 통화에 탑재되어 있다. 매일 4시경의 퇴근길에 거는 전화지만 내게 주어진 의무인 듯 전화를 거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조리 없는 엄마의 문장들 속에서 앞뒤 문맥과 진짜 원인을 찾니라 헤매다 보면 진이 빠져서 일이 고된 날은 전화 걸길 한참을 망설인다. 그렇게 전화를 건 날은 부디 엄마의 음성이 내게 힘이 되길 엄마에게 기댈 수 있길 바라고야 만다.


얼마 안 되는 동네 주민 중 한 명, 유일한 동네 친구와 대화를 나눈다. 친구를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친구가 내게 답을 구했다. 어떻게 그렇게 잘 키워내냐고 물었다. 당황스러운 질문이었다. 일단 잘 키워내고 있는 중은 아니며, 정답이 있다고 한들 이 정답이 그녀의 아이들에게 적용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설픈 답을 줬다간 부작용만 남을 뿐이다. 마치 육아서 한 권에 빙의되어 갓난아이를 그 육아서에 끼워 맞추려고 했던 나의 초짜 엄마 시절과 같다. 이 육아서에 아이가 맞춰지지 않는다면, 다른 육아서를 꺼내보는 거다. 다른 육아서에 또 아이를 끼워 맞춰 본다. 부작용이 이전보다 더 극심하다. 왜냐면 이랬다 저랬다 육아 방침이 휙 바뀌었으니까 아이로썬 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처음 만났던 날처럼 또 친구가 내게 답을 구한다. 양육의 고됨을 내게 토로하는 그녀에게 같은 이야기를 건넨다. 내게 정답이 없다고 말이다. 그간 그녀에게 들어온 이야기를 토대로 그녀 집에만 적용될 수 있는 해법을 내밀어보지만, 사실 답은 그녀가 찾아야 하는 것이고 답이란 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건 이미 전달한 지가 오래다.

"어떻게 그렇게 잘 키우나요?"라는 그녀의 질문에 내가 준 답은 "잘하고 있습니다."였는데, 이 답은 사실 메아리가 되어 우리 동네를 떠돌 뿐이다. 그 대답은 스스로에게 건네어야 하는 말이다. 오늘 같은 날은 특히 그러하다.


첫째가 눈을 맞추고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 지 며칠 안됐다. 책에 들이는 집중력을 더도 덜도 말고 사람에게 들이리라 결심한 지 2주 만이다. 큰 아이에게 책 같은 엄마가 되겠노라고, 호박씨라는 책의 주제를 정하고 꾸준히 그 주제를 알려주기 위해서 어르고 달래고 제안하는 책 같은 화법을 지속한 지 2주 만에 체력은 바닥이 났다. 사람 하나를 키워내기는 건 온 동네가 나서는 일이라는데 온 동네는커녕 딱히 의지할 이 하나 없는 강남 한복판에서 제정신 차리기가 쉽지 않았다. 잠이라도 푹 자면 좋을 텐데, 밤 중간에 일어나 스스로에게 주문을 외웠다.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모든 일은 잘 될 것이다."

"괜찮다, 잘하고 있다."

땀에 젖어서 잠에서 깨 오줌 누러 화장실을 갖다가 거울을 들여다보면, 사람이 아니라 책이 되어가는 내가 보여 자기 연민에 쩌들곤 했다. 이런 지 2주 만에 아이의 눈빛이 돌아오니 작은 아이의 순서가 왔나 보다.

큰 아이에게 신경 쓰고, 울고, 집중하는 나를 지켜보던 작은 아이가 내게 도움을 요청했다. 장장 6시간에 걸쳐서 진행되는 겨울방학 특강이 시작하기 2시간 전에 집에 와달라는 카톡을 보냈다. 기댈 곳이 되어줘야 하는데, 사실 내 상태는 거의 방전이다. 댐의 한쪽을 막으니 다른 쪽에서 물이 쏟아져내는 딱 이 모양이다.

시간이, 아이들의 자람이 장마처럼 내려 홍수처럼 나를 떠밀려 내려보낸다. 지푸라기도 없고 나뭇가지도 없고 맨 몸으로 찬 지 뜨거운지 알 수 없는 비로 두드려 맞는다. 자기 연민에 먼 옛날 내게 "네가 뭘 할 수 있는데"라고 퍼부었던 누군가의 폭언까지 떠밀려온다. 밤 한가운데 일어나 "할 수 있다"라고 아무리 외쳐본들 과거 폭언 앞에서 무기력하게 울 수밖에 없었던 시간들이 비와 함께 온몸을 때린다.

기대고 싶을 땐, 살아 있는 따뜻한 물성의 사람 말고 건조하고 마른 종이 위의 활자만이 위안이 된다. 인간성이 박살 나는 순간을 기록한 문자를 바라본다. 울지도 웃지도 누굴 탓하지도 않는 조용히 종이 위에 누운 활자들이 나를 위로한다. 나의 양육 또한 이 비바람을 다 맞고 누군가에게 위안이 되는 글로 남기 위해 이렇게 아프고 힘든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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