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맞는 다섯 번째 설이다. 타국에서의 명절은 독특한 기분을 불러일으킨다. 오라는 데가 없고, 가야만 하는 데가 없는 상황. 가족 구성원들에게 방향을 제시해야 하는 부담이 밀려온다. 해야 하는 게 없는 상황에서 주어진 어마어마한 시간, 예를 들면 열흘의 시간은 내겐 태산 같은 짐이었다.
정신줄 놓고 흥청망청 돈을 쓰고, 침대밖으로 하루 종일도 일어나지 않는 시간으로 열흘을 쓸 수도 있는 큰 유혹 앞에 오도카니 서있는 거다. 남편은 독일에서 그의 전 시간을 일에 갈아 넣었었다. 남편 또한 시간 조절이 힘든 편이라 주말만 되면 초점 없는 눈으로 24시간을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지내는 모양새였다. 그가 내게 요구한 건 단 한 가지, 부산의 부모님들에게 한국시간으로 구정을 맞춰서 전화하라는 거였다. 어찌나 하기 싫던지.
해외에서 호위호식하며 지낸다는 착각을 하기 딱 알맞은 전화 통화를 그가 하곤 했다. 어디를 가고 있다. 어떤 호텔에 묵고 있다. 우리 여기서 재미있게 잘 지낸다는 이야기를 진심을 담아서 함께 해줄 시댁 식구는 아무도 없었다. 친정식구라고 해서 달랐을까? 알콩달콩 시간을 잘 보내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면 시누들은 부러워만 했다. 시부모님들은 물색없이 호강한다 했다. 친정 엄마? 엄마는 우리 딸 고생한다며 감정적으로 바라보았다.
내게 명절은 한국에선 매해마다 다른 모양으로 다가온다. 한국에 없던 그 시간 동안 한국에서의 양가 식구들 또한 명절, 가족, 관계라는 파도 속에서 허우적거리다 남편이 카카오톡으로 보낸 여행사진을 보고 분통을 터뜨렸을 것이 분명하다. 이야기 없이 박제된 사진들 속에 일렬로 서있는 우리들의 사진, 어딘가로 향하고 있다고 고하는 밝은 체하는 우리의 목소리. 남편이 설정한 "우리 행복해요."라는 콘셉트의 포장지 안에 나까지 포함되기는 죽기보다 싫었다. 저 멀리 한국에서 명절이란 쉽지 않은 시간을 겪고 있을 양가 식구들의 마음을 짐작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누가 명절에 온다 안 온다 또는 누가 음식을 한다 안 한다 등등의 소통 속에서 엄마는 괴로워했고, 시댁은 세 자매들과 어머니 그리고 돌아가신 아버님 간의 갈등이 가득했으니까.
오란 데가 없는 우리 네 식구만 시간을 잘 보내면 되었을 터인데 싶다. 그 멀리까지 가서도 어떻게든 시댁이라는 울타리 속에 머무르고 싶어 했던 남편을 떠올리며, 독일에 안 갔었더라면 어땠을까 아찔하다. 그러니 그를 나무라기보단 지금이라도 시댁으로부터의 분리를 감행하고 잇는 그의 용기를 칭찬해 주는 게 낫겠다.
물론 오늘의 내가 마음먹고 있는 용기도 거듭거듭 칭찬해 준다. 누구 하나 해야 할 일을 했다고 칭찬해주지 않는 게 돈 많고, 시간 많아 생각 없이 살아도 되는 주재원 와이프의 삶이었다. 스스로를 칭찬하고 대견해하며 사랑해 줄 수 없었던 나를 떠올리며 오늘이라도 다른 내가 되는 중이다.
아들 온다고, 명절이라고 이것저것 준비하시던 홀로 계신 어머니가 전화를 한 시간은 아이들과 외식을 하고 돌아오던 시간이었다. 다리가 아파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며 자신의 고통을 호소하는 어머니의 전화를 가만히 듣고 있는 남편에게 부산에 가기로 한 계획을 변경하자, 지금 부산 가자고 제안하니 피곤해서 못 가겠단다.
남편은 저런 사람인 거다. 엄마가 아파서 꼼짝 못 하겠다 해도 그는 스스로의 피곤함을 무릅쓰고 무리하지 않는다. 관절 아픈 거야 시간이 가면 해결해 준다는 그의 말에 맞장구쳐주면 그만이다. 전 같았으면 힘들면 참고, 네가 나에게 강요하는 며느리로서의 의무를 너 또한 아들로서 최선을 다해서 행하라고 쏘아붙였을 것이다. 파스며 근육이완제며 바리바리 싸들고 당장 어머니를 뵈러 가야 하는 거 아니냐고, 나보고 어머니에게 온 정성을 다해라고만 하지 말고 너부터 솔선수범 하라 했을 터이다. 쏘아붙이기엔 지금 난 이대로 충분하다. 내가 오늘 하고자 했던 건 다 하고도 남았기 때문에 기분이 좋다. 아파서 꼼짝 못 한다는 엄마의 말을 듣고도 여유롭기 짝이 없는 그가 오늘의 내겐 참으로 적당하다.
화요일부터 친정엄마 목소리가 이상했다. 전화를 하지도 받지도 않는다. 친정식구 누구와도 이야기하지를 않는다. 매일 전화해 안부를 묻던 나와도 이야기하지 않는 엄마의 상태를 예전의 나였다면 감당하기 어려웠을 터이다. 남편의 여유에 빙의해 본다. 그래, 시간이 지나가면 해결이 되겠지. 엄마로서도 엄마 스스로 일어날 마음이 생길 때까지 기다리는 거지. 전전긍긍 불안한 마음에 방에 드러누운 엄마를 찾아간 적이 있었다. 어떻게든 엄마를 일으켜 세워보겠다고, 어린애들과 남편을 모두 데리고 닫힌 엄마 방문을 열었다. 돌이켜보니 내가 원하는 속도에 엄마를 끼워 맞추려고 최선을 다했다. 괜찮아지라고, 당장 털고 일어나라고, 우울증이든 불안증이든 그게 뭐든 간에 지우개로 지우듯 지우고 엄마의 자리를 지키고 멀쩡해지라고 욱여넣는다. 엄마에게 얼마나 나는 폭력적이었는지.
매일 엄마에게 건네었던 안부 전화는 아빠에게 드렸다. 아버지는 일상을 지키고 있었다. 엄마와 함께 출근하던 약국을 혼자 출근했고, 엄마가 차려주던 밥 대신 혼자 편의점으로 가 햇반과 김으로 점심을 해결한 스스로를 대견해했다. 아빠를 챙기는 엄마 덕에 아버지가 약국을 운영하셨던 게 아니라, 아빠를 챙김을 통해 엄마는 엄마의 시간을 채울 수 있었던 게다. 겉으로 보기에야 엄마가 아빠의 매니저, 돌보미인 듯 하지만 이렇게 엄마가 부재한 시간을 바라보면 엄마가 아빠에게 기대어 살고 있는 중이다.
이다지도 긴 명절이라 죄의식과 시간을 허투루 보낸다는 좌절에 빠져들기 쉽다. 악착같이 해외여행을 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면 비웃었더랬다. 어쩌면 저렇게라도 시간을 꽉 채워 보내고야 말겠다는 한국인은 독일 그 시절 어딘가로 여행을 갔었어야만 했던 바로 나의 뒷모습과 같다. 크리스마스며 부활절이며 긴 연휴만을 손꼽아 기다려던 독일인들과 닮은 꼴이 되어가 있는 모양이기도 하다.
명절 음식을 먹기 위해서 모인 가족들, 그 음식을 하기 위해 고된 노동을 하던 여자들이 사라지고 있다. 뭘 언제까지 꼭 해야 만한다는 개념은 흐려지고 있다. 그 덕에 매일이 혼돈이고, 어디든 기대고 싶지만 원칙도 답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시절이 행복했냐면 그렇지도 않다. 술을 걸친 할아버지와 할아버지의 형제들은 말다툼은 물론 주먹다짐도 했고, 밤을 새워 찬 부엌에서 음식을 하던 엄마와 할머니의 고초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시절이 사라진 오늘 이 명절엔 조그맣게 부서진 시간들이 흩어져있다. 눈을 크게 뜨고 착한 사람에게만 보인다는 반짝이는 행복을 찾으려고 허리를 구부려본다. 찾아야 한다. 이 긴 시간 속에 이렇게 흘러가는 시간 속 의미를 찾아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