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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일본을 가니

by 호박씨

몇 안 되는 어린 회사동료들이 너도 나도 일본을 간다. 진짜 사무실에 일본 안 가본 사람은 나밖에 없는가 싶어 괜히 불안하다. 애들은 그런 생각은 하지도 않을 텐데 나 혼자 지레 겁을 먹었다. 작은 아이야 일본 갔다 온 친구가 사 온 신기한 과자를 들고 와 즐거움을 내게 표하곤 한다. 친구가 많은 게 진짜 좋아서 내게 친구 많음을 자랑하는 것일 수도 있고, 맛있는 거 워낙 좋아하는 아이니 새로운 건 더 좋아하니 기쁨을 엄마와 나누고 싶은 마음 순수하게 그거 하나일 텐데. 그냥 같이 웃는 게 안된다. 옛날 사람 혹은 우리 엄마 같다.

강남 아파트 당첨이 되고, 계약금을 마련하고는 엄마와 연락을 안 한다. 엄마가 먼저 병이 났다. 마음 병이 나버렸다. 된서리는 엄마와 약국에 늘 함께 있는 아빠가 뒤집어쓰고야 말았다. 대통령이 탄핵될까 봐 전전긍긍하니라 밤잠을 못 자고 24시간 엄마 옆에서 유튜브를 들여보단 아빠가 엄마에게 약국 일보다 모진 소리 한마디를 했더니 엄마가 출근을 하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거야 그런 아빠에게 하루에 한 번씩 전화하는 게 다인 거다. 며칠은 걱정이 태산이덛니 사흘 지나자 단순한 우리 아버지 긍정모드로 전환하셨다. 삼시세끼 마누라가 차려주는 밥 먹으면 그 밥이 맛난 줄을 모르는 게 사람 마음인지라, 약국 옆 편의점 가서 햇반과 김, 참치를 사서 맛나게 차려먹고는 혼자서도 잘 산다며 내게 스스로를 자랑했다. 아빠가 끄집어낸 단어 중엔 심지어 "성취감"도 있었으니 엄마가 들었으면 속상했을지도 모른다.

"성취감". 스스로 자신의 끼니를 책임졌을 때 느낄 수 있는 감정이었다. 아빠가 30년 동안 지켜온 약국에서 벌어들인 돈은 엄마 통장으로 가서 아빠의 기억 속엔 흔적 없이 사라졌나 보다. 당첨된 아파트 계약금을 구하니라 애를 먹는 나를 보며 엄마가 가슴을 쥐어뜯으니 말없이 엄마 옆을 지키고 있던 아빠에겐 성취감은커녕 상실감이 컸나 보다.


남과 가족을 이루고 살면서, 자식이 내게 찾아오면서 하나씩 둘씩 깨달아져서 깨달음 부자가 되어간다. 내게 아주 드물게 기쁨을 주고, 대부분의 권태로움과 좌절, 그리고 외로움을 주는 삶 그 자체가 가족이다. 사무실에 나간 지 1년 6개월이 되니 그들도 거의 내겐 가족 같은 환경이 되어간다. 서운함이 생기도 섭섭함이 생긴다. 거리 조절하기가 쉽지 않고 자꾸 정이 든다. 아버지처럼 나 또한 어마어마한 부자가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당장에 내 옆에 있는 사람들, 내 삶을 채우는 가까이 있는 이들에 대해 생각하니라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한참을 아주 한참을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기 위해 내 시간을 보내는 일들이 업인 사람이 나다. 다정은 병인게다.

늘 혼자 먹던 점심은 씩씩한 척이란 척은 다했지만 서럽기 그지없었는데, 말 통하고 말 들어주는 도시락 친구 H가 생겨서 행복했다. 이 동료가 참으로 좋은 이유는 내게 지나갔던 혼자의 점심, 외로움이라 이름 지어 쌓인 시간 때문이다. 그런데 H를 생각하면 "성취감"이라는 단어만 자꾸 떠오른다. 내가 뭘 해서 이 친구가 점심 멤버가 된 것도 아닌데 생각할 때마다 기분이 좋아 가족같이 느껴진다.

일본을 간다니 엔화라도 챙겨줘야 하나 싶다. 나는 왜 이리 옛날 사람인가? H는 그저 오래간만에 식구들과의 여행이라 그녀가 그리도 좋아하는 디즈니 보러 가는 거라 마냥 좋기만 한데 나는 H의 여행으로 이리저리 이것저것 판단에 잠긴다. H의 아버지는 바빠서 못 간다고 하니 아버지 일정 맞춰서 가지 그렇게 빼고 가면 아버지가 섭섭하다고 오지랖 피우고 싶어진다. 꼰대 소리는 죽어도 듣기 싫고 충고는 하고 싶으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그냥 입을 닫는다.


이러니 나는 그냥 우리 엄마다. 이전 약국은 엄마 아빠가 운영하던 약국 중에서 제일 컸다. 경력단절된 내 나이, 내 나이보다 조금 더 먹은 주부들을 파트타임으로 대 여섯이나 부렸다. 아빠 목에 힘이 들어갔고 엄마는 아줌마들과 지내는 재미에 출근했다. 암 걸린 딸 뻘의 아르바이트생을 걱정하니라 엄마의 많은 시간을 보냈고, 알바들끼리 꿍짝 거리며 쉬는 날을 도모하자 친구들에게 배신당한 것처럼 속상해했다. 약국 사모님인데, 거의 사장에 다를 바 없는 실세의 마음이 다정하기 그지없었다. 엄마 아빠 인생 최대의 사업체였는데 엄마는 사람 부리는 거에 속 시끄럽다며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었다. 다정은 병인 것이다.



경기도 화성은 넓다. 아파트가 빼곡한 신도시도 있지만 부모님의 약국이 위치하는 공장지대도 있다. 공장들과 작은 밭, 얕은 산과 작은 호수가 규칙도 질서도 없이 섞인 그곳이 엄마 아빠의 마지막 일터가 될 터이다. 그리고 엄마는 또 사람들을 사귀었다. 납품하러 오는 기사가 암에 걸려서도 물건을 가지고 온다며 눈물짓는다. 마치 나처럼. 그러거나 말거나 강남 사는 딸내미 아파트 당첨된데 도움 되려면 악착 같이 돈 벌어야겠다 하면 될 텐데, 내 생각만 하기엔 주변 돌아보기에도 바쁘다. 애쓰는 딸을 보면 마음 아픈 정도가 심각해서 그놈의 아파트는 왜 당첨됐냐며, 축하한다는 말 한마디 하질 못한다. 왜 내게 걱정거리를 안기냐는 오직 그런 불평과 타박만이 내게 돌아온다. 지친다. 다정한 사람이 부모라 지친다.

이기적으로, 아주 이기적으로 새로운 나로 살아보고자 작은 아이를 데리고 돈 100만 원 현금으로 뽑아서 이 돈 다 쓰고 오자며 2박 3일을 도쿄에 가서 지내볼까 100번 넘게 생각해 본다. 안 하던 짓 하면 죽는다는데 죽을까 무서운 건지, 나의 지극히 이기적인 생각이 돌아 돌아 어느 세월을 돌아 내게 돌아올까 봐 무서워서인지 생각만 하고 행동엔 옮기지 못하고 있다. 일본행 비행기를 타는 날이 내게 올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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