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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로 세상을 보는 아줌마

by 호박씨

1년 하고도 9개월이 지났다. 하루만 더 하루만 더 하는 날들이 흘러 흘러 여기까지 왔다. 하루는 길기도 길고, 1분이라도 일을 더해야 할라치면 몸서리치게 내 마음과 신경이 아까워 죽는다. 주말은 어찌나 짧은지 자도 자도 잠이 온다. 퇴근길은 또 얼마나 몸이 무거운지 이루 말로 하기가 힘들다. 집으로 돌아오는 오르막은 왜 이리 높은 건지, 아침 출근길엔 왜 굴러 내려가듯 속도가 빨라지는 건지. 불평을 하기 시작하면 한이 없고 끝이 없다.

세상이 내게 바라는 건 이야기를 들어주고 칭찬해 주며 무대 배경처럼 어우러지듯 지내는 것이다. 주인공은 호박씨 네가 아니라고 그들이 말한다. 어느 누구도 나를 격래해줄 여유는 없으며, 오로지 회사 또는 일 뿐이다. 손톱만큼이라도 본인 힘들 일이 있으면 그거 해냈다고 말하고, 사건 사고란 당연히 터지는 건데 왜 그런 일이 자꾸 터져서 젊은 그들 자신을 늙게 만드냐고 0.1초도 망설임 없이 투덜거린다.

나는 그들이 내게 뭘 바라는지 너무나도 잘 안다. 만만해 보이는 나. 만나면 다정하게 잘해주는 내게 그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자꾸자꾸 내게 요구한다. 기분 맞춰 달라고 징징 댄다.


어디 그게 일 뿐이겠는가? 내 새끼, 내 아들, 내 딸이 세상에서 제일 잘났다며 어디서 굴러온 돌덩이 취급하던 시어머니. 어제오늘 전화해서 아들 좋아하는 시래기 끓여서 보내겠다고 내게 고한다. 감사하다는 말 이 그상 뭐가 필요하겠는가만은 그녀는 외롭디 외로운 미망인이라 자꾸 내게 바라고 기댄다. 살아야 하는 이유를, 그녀가 홀로 남아있는 이유를 거듭 내게 묻는다.

"된장찌개도 끓여 보낼까 해서 전화했는데, 안 받더구나."

업무시간 전화하면 뻔히 안 받는 줄 알면서 그녀는 내가 전화를 받지 않아 된장찌개, 그녀의 손주 즉 큰 아이가 좋아하는 그 메뉴를 택배로 보내지 못한다고 강조한다. 그녀의 손주는 감기 걸려 목 아프다며 어제부터 공부는 손도 안되고 푹푹 잠을 자고 있는데 말이다.


피곤함이, 무게가 우역우역 밀려온다. 파트타임이라 도망치듯 먼저 퇴근하는 맛을 제대로 진하게 느끼는 중이다. 좁은 공간에서 함께 숨 쉬고 있다는 게 싫어지는 타이밍에 딱 되면 딱 퇴근해 버린다. 많이 벌어서 많이 써도 좋으련만 당최 나란 인간은 사람이 싫어지는 정도에 비하면 1/10도 돈을 못 번다. 그러니 계속 내일도 모레도 출근해야 한다. 며느리로 아내로 엄마로만 사는 시간 동안 미워하고 증오하고 기대고 애정하는 가족들에게 거리 유지를 하기 위해서라도 일터로 향해야만 한다. 가족이라는 울타리로 그들을 바라보면 그저 내게 빨대 꽂는 것만 같아, 숙제 검사하는 담임선생 같이만 느껴져서 싫다는 감정이 하늘을 찌르니, 일터로 나가 다른 사람을 싫어하는 게 낫겠다 싶다.



이렇게까지 사람 싫어하면서 다녀야 하는 이유. 일로 세상을 들여다보니 가족들은 그만하면 양반이다 싶게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끼역끼역 집으로 향해 돌아와 조용히 밥을 짓고 혼자 넷플릭스를 보며 반찬을 하고 저녁밥을 먹는다. 욕하지 않고, 성질내지 않고, 백번 넘게 마음속에 참을 인자를 새겨가며 말을 고르고 글을 발가낸 내게 저녁밥을 차려 낸다. 무얼 먹어도 소화도 안되고, 식욕이 없으며, 하루에도 대 여섯 번씩 큰 일 보러 화장실을 들락거리는 아줌마, 나를 위해서 밥을 짓고 한 끼 맛있는 밥을 먹이는 거다.


나를 향한 위로는 내가 해야 하는 법. 남하고 1년 9개월을 지내고 나니 나하고 지내는 건 일도 아닌 것이다 그런 것이다.

사진: UnsplashPeter Thom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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