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죽하면 내게 연락을 했을까 싶다. 엄마의 목소리는 시름이 베여있다. 용건 없이 전화를 끊는다. 전화를 걸어온 타이밍이 좋지 않다. 오죽하면 내게 전화를 했을까 싶다가도 엄마친구는 나지 싶다가도, 엄마는 왜 이렇게 나한테만 힘들다고 할까 싶다. 도와달라는 이야기인가, 그렇기엔 나는 딸인데.
엄마가 집을 나갔다. 스물 중반이었다. 한의사가 되겠다고 2년 반 정도를 공부했는데, 성적은 나오지 않았다. 어떻게 사나 또는 뭐 하며 사나, 세상이 끝났나 보다 했다. 그런데 엄마는 집을 나가버렸다. 나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았을는지도 모르겠다. 겉으로 드러난 집 나감의 원인은 약국 자리를 옮기는데 아빠와 의견이 맞지 않는 것이었지만 돌이켜 보면 난 그때 힘들었고, 엄마도 나의 힘듦을 나눠가졌을 거라 추측된다.
사라진 엄마를 부지런히 찾아다녔다. 엄마는 외할머니댁에도 편히 지내질 못하고 마음 붙일 혼자 사는 친구네서 열흘 정도, 나름 길게 지내더니 내게 연락을 했다. 엄마의 독립을 돕기 위해서 내 최선을 다했다. 결혼율이 어마어마헀던 시대여서 다들 결혼하고 애 낳고 살아야 한다고 하던 시절인지라 엄마는 폐백음식 전문점을 차리고 싶어 했었다. 폐백음식은 건당 백만 원 했다. 그때도 엄마는 음식으로 예술을 하고 싶어 했다.
엄마는 그냥 집으로 돌아왔었다. 아빠가 고집한 약국 자리에 약국을 열고 또 무진 애를 썼다. 아빠의 선택이 그릇되지 않게 하기 돼 해서, 망할까 봐 겁이 나서 잠도 적게 자고, 깨어있는 시간은 동동거리기만 하면서 그 자리와 그 언저리 자리에서 20년 넘게 약국을 열었다. 집까지 나가면서 반대했던 사람이 맞나 싶을 지경이었다. 그 자리를 선택하는 걸 그리도 반대했었다는 역사를 아빠는 엄마에게 한 번도 말하지 않았다. 엄마는 늘 내게 자랑했다. 그 자리에 이렇게 내가 애를 썼기 때문에 이만큼 된 거라고. 아빠한테 맡겨두었다면 밥 굶었을 거라고 거듭거듭 오직 내게 이야기했었으니까 어렴풋이 알 수 있다. 엄마는 칭찬에 목말라있었던 게다.
두 사람은 많이도 싸웠다. 좁은 약국에 긴 영업시간 내내 붙어있으면서 계속 싸우고 계속 서로에게 상처를 준다. 그리고 아직까지는 함께 있다.
"이혼할 거야."
첫 전화를 하고 3시간쯤 지났을까? 엄마에게 다시 전화가 왔다. 안 살겠다는 이야기를 울먹거리며 굳이 내게 하는 이유는 엄마말로는 '알고 있으라고'가 이유다. 엄마 생각에는 아직도 나는 엄마의 울타리 안에 있나 보다. 엄마 결혼생활의 카운슬러고 무조건 엄마 편인 친구, 그게 나 호박씨인 것이다.
그래서인지 '폭싹 속았어요'의 수많은 눈물 포인트 중에서 내게 압권은 애순이의 금영이에 대한 친구선언이다. 내게 애순은 숨 막히지만, 애순이에게 금영이는 둘도 없는 친구다. 가장 오랜 친구. 애순이의 대학에 대한 한을 풀어줘야 하는 금영이. 서사만 들어도 숨 막힌다.
금영을 업고, 어린 금영이의 첫사랑에 대한 비밀을 공유하는 애순이를 보며 눈물짓는 이유는 나는 친구를 배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게 베프는 엄마가 아닌 지 오래다. 엄마는 엄마일 뿐, 내 친구일 수 없다. 잘 살려면 그 누구보다도 내가 행복하고자 한다면 나의 베스트 프렌드는 남편이어야만 한다. 내가 선택한 인생의 동반자, 그에게 마음이 안 드는 면이 수억 가지여도 그는 내 인생 최고의 친구이다. 엄마가 먼저 떠날지 내가 먼저 떠날지 알 수 없지만, 삶의 마지막 순간이 누구에게 언제 올지는 모르지만 일단 내 마음은 집을 나오면서 이 사람과 같이 늙어가겠다고 마음먹었으니 남편은 내 최고의 친구이다.
그래서, 애순이의 금영이에 대한 고백 앞에서 나는 대성통곡을 한다.
엄마, 미안해.
집 나갔던 엄마가 돌아오고 3년여 후였을까? 엄마가 내게 말했다. 너 시집보내고 이혼하려고 돌아왔다고 했다. 결혼을 준비하면서 엄마에게 떠오른 건엄마, 아빠가 이혼하지 않았기에 내가 결혼도 하고 상견례도 하고 결혼식도 치르는 거라는 생각이었다. 남 보란 듯이, 남들과 비슷하게 결혼하고 애 낳고 살 수 있는 건 내가 딸 너를 떠나고 아빠와 이혼하지 않고 참아서야. 너 때문에 돌아왔단다. 엄마는 너 때문에, 너를 위해서 돌아왔단다. 그 말이 내겐 찌르는 듯한 고통이었다. 왜 엄마는 나를 위해서 본인 인생을 참는 것인가? 설령 그렇다고 한들 나를 위해서 했다고 하면 그 죄책감의 무게는 어떻게 이겨내라고 그렇게 말하는 것일까? 원망스러웠다.
엄마와 나의 관계는 조직폭력배 같고, 중세시대 같다. 우리는 끈끈한 게 아니라 치덕치덕하며, 배신하고 기대하며 사랑하고 죄책감을 느끼고 고통스러우며 눈물 훌리는 그런 관계다.
굳게 마음을 먹어본다. 베프는 아니어도 엄마는 여전히 나의 친구니까, 정신을 차려본다. 친구의 이혼 결심 앞에서 의연해야 한다. 게다가 나는 아빠의 자식이기도 하니, 이 둘이 백년회로를 하든 각자의 행복을 추구하며 살든 어떤 식으로 지내든 옆에서 잘 지켜보고, 관심 가지고, 잘 들어주면 그걸로 그만이다. 친구 연애 상담 해본 적 있는지? 연애상담은 결국 듣고 싶은 말이 정해져 있다. 그 순간 그냥 위안이 되는 말이 있는 거다. 결정은 스스로의 몫이며 연애 과정은 고통스럽기에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어서 자기도 자기 마음을 읽을 수 없으니 타인이 마음을 읽어주면 그걸로 그만이다. 관계를 어찌 꾸려나갈지에 대한 조언은 상담가의 몫이 아닌 거다.
그러니, 내 생의 첫 번째 친구의 말을 열심히 들어줄 생각이다. 한평생을 같이 보내온 사람을 견딜 수 없다면, 엄마는 엄마의 삶도 꼴 보기가 싫을 게 분명하다. 우리네의 인생은 이렇게 나처럼 운이 좋아 글로 새겨지기도 하지만, 엄마 세대처럼 배우자에게 아로새겨지는 경우가 흔하다. 엄마의 삶의 여정은 아빠에게 새겨져 있어, 아빠를 보면 엄마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고스란히 알 수 있다.
엄마는 아빠랑 살기 싫은 게 아니라 살아온 시간들이 후회가 많이 되나 보다. 엄마의 마음을 읽어주기 위한 시간을 내야겠다. 호박씨도 좀 괜찮을 사람이 될 수 있는 기회를 그리고 20여 년 전의 죄책감을 떨쳐버릴 수 있는 기회를 잡은 게다. 지금이 기회다. 내 친구를 위하고 나를 위할 수 있는 기회. 온전한 우리가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바로 엄마의 이혼 선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