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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부모 가짜 부모

by 호박씨

무시무시한 뉴스가 아침 신문 헤드라인에 올랐다. 아이를 가져야겠다고, 또는 가정을 꾸려야겠다고 마음먹은 그 젊은 날엔 이런 뉴스들이 나를 몸서리치게 할 줄 알았던가? 첫 임신 소식을 듣고 겨우 두 번째로 병원을 방문했을 때, 심장소리가 들리지 않았고 계류 유산 수술을 받았다. 생명이 내게 찾아왔다가 홀로 떠났다. 아마 심장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젊은 산부인과 의자의 음성을 나 혼자 듣던 그날부터였을 것이다. 혼전임신이라 아무도 모르게 혼자 방문한 작은 병원. 결혼하고 임신 중이던 강남 사는 언니 같은, 아니 재수한 동기라 실제로도 언니인 그녀의 강남이란 지역의 명성에 의지해 퇴근하고 홀로 찾아간 병원이었다. 그 어느 누구도 생명이 사라짐을 슬퍼해주지 않았다.

임신 사실을 친정엄마에게 알리자마자, 엄마는 절연을 할 기새였다. 유산 수술을 하고도 집에서 혼자서 이틀을 쉰 게 다였다. 심장을 갖지 못한 채 사라져 간 수정체가 세상 그 무엇보다도 소중했던 건 전 우주를 통틀어 나하나뿐이었다. 샴푸를 샴푸바로 바꾸고, 색조화장을 멈추고, 밥을 챙겨 먹었다. 고작 2주의 기간을 그 생명을 위해 나를 위해주었었다.

떠난 이를 위한 눈물은 나만의 것이었다. 친정의 수치고 예비 시댁의 골칫거리였다. 시댁에선 그 해에는 결혼하면 운수가 좋지 않다는 점괘에 맞춰 결혼 시기를 1년 후로 잡고 있었다. 예비 남편인 남자친구는 시간을 뭉개고 있었다. 온 우주에서 그 생명과 나뿐이구나 하는 시간, 2주가 끝난 날로부터 나는 여전히도 그 시간에 멈춰져 있어서 생생히 그날들을 기억한다.

숫자가 중할까? 2주이든 10년이든 40년이든 생때같은 자식이 사라지는 괜찮을 수 있는 인간이 있을까? 신문의 소제목에 아이의 아빠가 조문객들을 향해 "괜찮다."라고 말하고 조문객들을 오히려 위로한다고 했다. 기사를 쓴 기자는 자식이 없을 것이다. 자식이 있다 해도 진짜 부모는 아닐 것이다. 어디 기자뿐일까? 교사를 다시 학교로 돌려보낸 교육청 책임자들은 자식을 공교육에 맡기지 않은 이들일 것이다. 혹 그들이 아이를 공교육에 맡겼다고 하더라도 밤 한가운데 일어나 앉아 해외 어딘가로 아이를 내보내야겠다고 결심할 것이다. 도둑이 제 발이 저린 셈이다.

한 어린 생명이 교사의 칼에 맞아 학교에서 사라졌는데, 경제 신문은 여느 날과 다름없이 유명 해외대학을 나온 학벌을 돈 잘 버는 이 사진 아래 이력으로 써넣는다. 어린 그 생명이 사라지면서 공교육도 사그라들고 있다. 당신이 어떤 좋은 대학을 어떻게 갔건 간에 당신을 여기까지 이끈 건 전쟁통에 지어진 학교 그리고 학교를 가득 채우던 열기 덕이 3할은 넘을 것인데... 아니 전부일지도 모른다. 경쟁적으로 배우고, 배고픔이 무서워 익히고 배우던 그 교육열 덕에 우린 여기까지 왔을 터이다.


한국에 돌아왔을 때, 부단히 도 학원을 보내지 않기 위해서 애를 썼다. 작은 아이를 때려가며 큰 아이를 다그쳐가며 집 앞 초등학교와 공교육에서 성공을 거둔 엄마, 바로 나 만으로도 과거의 신화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거라는 착각에 빠져있었다.

방학이라 아이들이 집에 있어 있는 오후 4시, 퇴근하며 전업주부로 그들을 집에서 돌봐 돌봄 교실을 보내지 않고 학원의 큰 도움 없이 감시 카메라처럼 그들 옆에 붙어있었던 시간을 감사해하는 나를 발견한다. 나는 가짜 부모다. 내 새끼만, 내 아이들만 무사히 죽지 않고 살아있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세상에서 가장 이기적인 존재는 진짜 엄마가 아니다. 모두 다 죽어나가는 그 전쟁통에서 내 아이만 살아 나왔다면, 그건 축복이 아니라 저주인 게다. 심장소리를 잃지 않고 세상에 아이를 꺼내놓았다면, 아이는 그 순간부터 나의 것이 아니다. 산고의 고통은 키우며 아이가 자리에서 일어나던 그 순간 그리고 엄마라고 처음 불러주던 그날, 아이가 첫걸음을 떼던 그 웃음으로 퉁쳐야 한다. 진짜 부모라면 내 아이의 죽음만이 아닌 다른 아이의 죽음에도 찢기는 아픔을 느껴야 한다.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행동해야 한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내가 서있는 자리에서 어린 생명의 죽음을 추모한다. 함께 일하는 동료들에게 친절과 여유를 베풀어 본다. 나란 사람은 그들이 내게 말 걸어주고 이름 불러줌으로써 존재한다. 그들로부터 내가 존재하는 셈이다. 나를 존재하게 하는 그들이 매일 나를 낳는다. 가정에서 나를 기다려주고 나와 통화를 나누는 아이들이 매 순간 나를 엄마로 만들어준다. 오늘은 가짜부모이지만 내일은 진짜 부모가 될 수 있겠거니. 오늘 내 주변에 있는 이들에게 매 순간 감사와 고마움을 표하고 '나'라고 이름 붙여진 존재를 산산이 부숴버린다면!

그리고 내게 이런 오늘을 다시 맞을 수 있게 아이들을 빼앗아가지 않은 신에게 감사한다면 말이다.

당연함이란 하나도 없는 게 이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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