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어이 부모가 되고 싶었다. 내겐 없는 완벽한 부모를 가질 수 없다면, 그 완벽한 부모가 되면 되겠다고 다짐했다. 계획한 대로 되지 않아 기준에서 본다면 거의 망한 걸로 보였던 스물 후반의 어린 여자가 먹은 마음이었다. 내게 회사의 유니폼을 강요하지 않는 어른, 아무렇지도 않게 내 몸을 만지는 나이 든 남자들. 그리고 부모라는 이름 하에 한 없이 이기적이고 나약한 주변을 보면서 칼을 갈았다. 본 적 없고 겪은 적 없는 멋진 어른, 완벽한 엄마가 되겠노라고 말이다.
아들이 말한다. "내가 다 아는 이야기를 알려줘서 고마워. 엄마가 뭐라고 하든 난 내가 하고 싶을 때 할 거야. 내 잘못을 아무리 짚어줘도 내 마음대로 할 거라고. 전화 끊어."
17살의 아이가 빠르게 말을 뱉고 핸드폰 너머로 사라진다. 아이는 이제 내가 부모가 되어야겠다고 마음먹었던 그 나이에 더 가깝다. 세상에 없는 어른, 내가 겪어본 적 없는 멋진 부모가 되겠다고 생각했던 그때의 나이에 더 가까워졌다. 열일곱의 젊음, 어설픔, 위태위태함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아이의 말을 귀로 받고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고속터미널 지하상가에서 겨우겨우 집까지 10여분을 걸어 도착했다.
아이의 저런 말을 분하게 여겨 과외도 끊고, 현관문 도어록 번호도 바꾸고, 다시는 아이 얼굴을 보지 않게 집에서 내쫓아 버린다거나, 지금 당장 대치동으로 택시를 타고 가 대치동 한복판 아이 학교 앞에서 두들겨 패고 싶은 상상을 실컷 해본다.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서 아이가 내게 쏟아부은 말과 그에 따라 무너진 감정을 보상하기 위해 휘두를 수 있는 수단을 하나하나 나열해 본다. 1분이 채 걸리지 않아 이내 포기한다. 무엇을 위해 이런 리스트를 만들고 있는 건가? 본 때를 보여서 다시는 엄마에게 저런 말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다시는 아이의 저런 말로 상처 입고 싶지 않아서?
엄마, 그때 나 왜 유학 안보 내줬어?
그 한 마디를 하지 못해 긴 시간을 드러누웠었다. 정확히 아이 나이, 고 2에 다시 그림을 그리겠다고 했다. 그림을 전공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다시 공부. 가슴을 뜨겁게 하는 그 무엇인가를 하려면 높은 수능성적이 내게 선택의 자유를 줄 것이라고 속절없이 믿었다. 좋은 대학은 오해를 더했다. 대학교 2학년. 다시 엄마에게 물었다. 이제 바다 밖으로 보내달라고, 원하는 것 하고 싶으니 도와달라고 했다. 얻은 답은 여전히도 다르지 않았고, 성인이 되어서도 이렇게 철이 없냐는 더욱더 원망 어린 시선이 쏟아져내렸다.
그렇게 나의 고2와 스물이 지나갔었다. 하고 싶은 말을 모두 다 뱉어버리는 아이. 지금의 내 아이는 나를 실컷 원 없이 원망하고 있을까? 나는 아이에게 충분한 욕받이가 되고 있는가 말이다. 세상을 향해서 싸울 용기와 맞설 연습을 아이는 나를 상대로 하고 있는 중이다.
엄마에게 난 왜 더 끈질기고 집요하게 설득할 수 없었는지, 눈치만 보다가 듣고 싶어 하는 답을 주지 못하니 눈물만 흘리던 날들이었는데, 아들은 전화로 내게 매섭게 말하고 먼저 전화를 끊을 줄도 안다. 엄마도 사람인데, 아이는 내게 더 많은 것을 바란다.
엄마라도 내 마음대로 움직여주라. 엄마라도 내 욕 받아주라. 엄마는 내 원망을 들어주세요.
기어코 부모가 되고 있다. 부모라는 게, 어른 노릇 한다는 게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지라 내가 접한 대부분들은 루저다. 그들인들 멋진 어른, 괜찮은 부모가 되고 싶지 않았겠나 싶다. 결국 그들 나름의 최선을 다해서 스스로가 옮음을 증명하면서 살아간 것일 것이다. 살고 싶어서 이기적으로 굴었을 것이다. 곁에 있는 약한 자, 어떤 위해를 가해도 되갚아 주지 않을 아니 되갚아 줄 수 없는 자들에게 스스로의 이름을 새겨 넣는다. 새겨 넣어진 이의 몸에 흐르는 피와 고통만큼 가해자는 증명된다.
빛나는 존재의 그림자는 깊고 어둡다는 걸 안다. 아이 덕분에 잘 알게 되었다. 빛이 아니라 그림자가 되겠다고 아주 깊고 어두워 끝을 알 수 없는 그림자가 되겠다고 마음을 먹은 스물 후반의 어린 여자가 있었다. 그 여자의 바람이 지금이 나다. 그 마음먹음의 미래가 오늘의 호박씨다. 그러니 고통스러운 만큼 그 바람이 이루어지고 있는 중이란 걸, 그래서 울기 보단 웃어야 하고 불행해하기보단 행복해해야 한다는 걸 쓰라리게 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