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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석 같은 인연은 지구 반대편에도 있다.

- 여자 친구 만들기는 어려워.

by 호박씨

" 엄마, 나 조금만 더 놀다 갈게, 응? "

아파트 앞 배드민턴 장에서 전화를 거는 게 분명하다. 배드민턴 채를 여러 개 들고나갔으니 같은 반 남자애들과의 배드민턴 경기가 곧 끝날 것 같진 않다.

딸은 어제 나에게 선언을 했다. 5학년이 되어 단짝 친구가 두 명 생겼는데 본인은 이 여자 친구들 두 명과 지내는 것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한다. 여자 친구 만들기는 골치가 아프니 포기하고, 남자애들 그룹으로 소속을 바꾸겠다고 말이다. 한국 와서 여자인 친구가 두 명이나 생겼다며 벅차게 기뻐하던 것이 올 4월이었는데 갑자기 포기 선언이다. 여자 애들은 뭔가 까다롭고 복잡하며 애매하다고 한다. 남자애들하고는 배드민턴을 치면서 노니 이기고 지는 재미가 쏠쏠하다고 한다. 생각을 필터 없이 이야기하고, 여자 애들보다 감정을 즉각적으로 표현하니 뭐든 심플하다고 한다. 나는 2017년 딸의 국제학교 1학년, Grade 1을 떠올린다.


3년째 다니는 국제 학교 부설 유치원에서 딸아이는 네이티브 급의 영어를 구사한다. 국제학교 안에서 친구를 사귀는 데에는 소통 차원의 문제는 해결이 된 셈이다. 3년 차씩이나 됐으니 외국인 절친 정도는 절로 생길 줄 알았다. 큰 아이는 친구 무리가 생겨 얼굴 보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이 집, 저 집 학교 주변 동네 친구 동네 집에 놀러 다니느라 바빴다. 여기저기 플레이 데이트를 데려다줘야 해서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아들을 보면서 딸아이도 조그만 더 크면 저런 날이 오겠구나 기대할 수 있었다.


딸아이는 만 4세의 First Step으로 유치원에 입학을 하였다. 반 아이 10명 정도의 구성이 30%는 교직원 자녀, 30%는 독일 재벌, 30%는 미 대사관을 포함한 다국적 주재원이었다. 교직원 자녀들은 가족 같은 분위기로 학교 주변에 모여 살면서 서로서로 워낙 친하다. 독일 재벌이나 의사, 변호사들은 자녀를 국제 학교 유치원부터 12학년까지 다니게 하고 미국으로 대학을 보내는 경우들이다. 교직원 자녀는 학비가 할인이 되고 주재원들은 회사가 학비의 일부를 부담해주니 비싼 국제학교 유치원에 아이를 보내는 셈이다. 만 4세처럼 아이들이 뭘 모를 때에는 재벌집 독일 아이건, 교직원 미국 아이건, 주재원 한국 아이건 둥개 둥개 잘 지냈다. 아가들이 본인 건사하기도 힘든 때이니 절친이랄 것도 없다.


학년이 올라가서 유치원 내 교우 관계도 사정이 달라진다. 딸아이는 네이티브 영어를 구사하는 몇 안 되는 한국 여자 아이다. 유치원에 있는 한국 여자아이들이라는 선택지 속에는 딸아이 친구가 될 법한 이는 드물었다. 선택지가 좁으니 그런 현상은 더 심했다. 여자이고 엄마인 나에게도 그랬다. 고만할 때야 엄마 친구가 애들 친구인데 내 맘 같은 이를 만나기가 하늘의 별따기보다 어려웠다.

그래도 나는 딸아이보다 나은 편인 것이 아들 친구의 다국적 엄마들 중에서 좋은 인연을 찾을 수 있었다. 딸아이는 그렇지 못하다. Pool이 훨씬 작다. 내가 아들 친구 엄마들과 마음의 위로를 얻는 동안 딸아이는 나름의 살 길을 찾았다. 남자애들과 어울려 노는 것이었다. 아들과 아들친구들을 늘 보고 어울리다 보니, 또래 남자애들과 통하는 바가 있었다. 게다가 딸아이는 몸으로 하는 것은 소질이 있어서 남자애들과 놀면서 에너지를 얻어갔다.

남자애들과 어울리는 딸아이의 상태를 알면서도 사실 도리가 없었다. 맘에 안 맞는 한국 여자애들 엄마들은 나에게도 고민거리였다. 나도 그들과 친구가 될 방법을 알지 못한다. 딸아이도 그랬겠지. 그 엄마에 그 딸이니까.


여자애들이 끼리끼리 놀기 시작하는 Grade 1이 되었다. 첫날 Homeroom 앞에 아이들 이름이 적힌 목록이 붙어 있다. 딸아이처럼 철자가 n으로 끝나는 세음절을 가진 이름이 2개나 보인다. 딸의 기분은 정말 최고였다. 한국인인가 보다, 셋이 다 여자인가 보다 하고 뛸 듯이 기뻐했다. 새로 시작하는 관계이니까 혹여 저 아이들 엄마가 내 맘에 안 들더라도 나를 구겨 넣어보리라 굳게 마음먹었다.

아이도 나도 외로웠나 보다. 독일 살이는 3년 차에 접어들었고, 남의 나라 살이가 익숙해지니 지침이 비집고 나오기 시작했나 보다. 우리의 외로움이 그날부로 채워졌다면 이 글을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했을 테다.


나는 국제학교 속 외국인들을 아이들이 조심해야 할 어른과 조심하지 않아도 되는 어른으로 구분하고 있었다. 지난 글 '영어의 실체'에서 밝혔듯 나는 국제 학교의 모든 교직원이 열린 마음의 소양을 갖추었다 믿지 않았다. 뾰족한 의심과 근심 어린 눈으로 학교를 향하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서양인들과 계속해서 부딪히다 보니, 비영어권 사람을 같은 눈높이에서 대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나눌 수 있는 감이 생겼다.


Openhouse Day 개학일이 되면 나는 고슴도치보다 더 뾰족해진다. 아이와 1년을 보낼 담임 선생님을 꼼꼼히 살핀다. 내 아이를 한국인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두 개의 문화 위에서 줄타기를 하는 어린이로 바라봐 줄 수 있을지 알고 싶다. 종교를 믿는다면 어느 신에게라도 기도하여 바랄 텐데, 나의 백은 나뿐이라 내가 믿는 구석은 오로지 나다.


오픈하우스 데이에는 부부가 다 참석하고, 형제, 자매도 데리고 와서 담임 선생님에게 인사한다. 외국인 가정의 경우 형제자매가 많고 다들 이 학교에 다니니, 형이나 언니, 오빠가 이 홈룸에서 1년을 보내고 다시 선생님에게 인사를 하러 오는 풍경도 심심치 않게 본다. 얼마나 부러운지 모른다. 함께 보낸 시간에서 오는 저 훈훈함 말이다. 저 아이의 가족들에 둘러 쌓여 있는 담임 선생님조차 가족적인 분위기로 그들과 어울린다. 난 언제 저래 보나. 왠지 아빠들이 담임과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그 한해 저 아이에 대한 매우 중요한 사안을 아이에게 전달하는 것 같아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모두가 다 이야기를 나눈 것 같아 보이면 기다리던 나의 순서가 온다. 그제야 용기를 내어 다가간 나. 한 해 동안 아이를 잘 부탁한다는 말을 하고 와야 그날 밤 발 뻗고 잘 수 있다. 부탁한다는 내 말을 듣는 담임의 눈과 분위기를 유심히 살피며 올해는 괜찮겠구나 또는 올해는 안 괜찮으니 신경 좀 써야겠구나 하는 판단을 내릴 수가 있다. 어느 쪽이든 알아야 잘 수 있다. 당장 다음 주부터 학교를 가야 하는데 깜깜이라면 불안하다.


Ms. Fiona가 딸아이의 Homeroom 선생님이었다. 우아하게 틀어 올린 머리와 자기 연배보다 5년 정도 젊은 옷차림새의 센스, 톤은 높지만 신경질적이지 않은 영국 영어, 웃으면 생기는 그녀의 반달눈 옆 주름까지 예뻐 보인다. 다른 부모들에게 따뜻해 보이는 그녀를 계속 지켜보며 사실 나는 더 초조해진다. 저 미소를 나에게 그리고 딸아이에게 지어줄지 아닐지는 확률 게임이다. 미소는 띠운다고 하더라도 느낌은 더 안 좋을 수 있다. 노골적이지 않은 경계와 차별은 상대하기가 더 어렵다.

올해는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작은 희망은 있었다. 피오나 선생님 교실에 들어오자 교실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기니피그 우리와 투명하고 깔끔한 어항 속 열대어들이 보았다. 드라이클리닝 한 듯 반질반질한 아기 기니피그 두 마리가 열린 케이지를 활보하고 있었다. 잘 보살핀 기색이 역력한 동물들이 살고 있는 교실의 호스트는 마음이 따뜻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기니피그 케이지 앞에서 딸과 기니피그를 쓰다듬는 척하며 나는 선생님과 대화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나는 계속 다른 엄마들을 지켜봤으니 그들을 그대로 따라 하면 된다. 손을 내밀고 나의 가늘고 높은 한국어 음성을 낮고 굵게 내려본다. 자주 사용하는 단어지만 유치하지 않은 것으로 골라 나와 우리 가족을 소개하리라 마음먹었다. 용건이 있는 모두와 대화한 듯 판단하여 교실 문쪽으로 나서는 그녀의 뒤를 쫓아 가 내 인사를 한다.


고마웠다. 내 몸의 일부라도 나눠주고 싶을 만큼 고마운 기분 혹시 아시는지 모르겠다. 미스 피오나의 표정과 음성은 다른 이들을 대할 때와 나를 대할 때가 전혀 다르지 않다. 나는 좀 천천히 또박또박 말을 했는데, 키가 작은 나를 향해 고개를 기울이며 나의 말을 경청해주고 명랑하게 답해주는 그녀에게서 나는 위로받았다. 그간의 시간들을 그녀가 위로해준다는 착각이 들 지경이었다. 대화를 마무리하는데 맥락 없이 그녀가 말한다.

" 너의 영어는 참 훌륭한 것 같아."

" 고마워."


할 수 있는 말이 고마워 뿐인 것이 한이다. 물론 나는 나의 얼굴로 표현할 수 있는 미소의 최대치를 그녀에게 발사했다. 내가 딸 대신에 1학년으로 등교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딸은 양보가 가능해도 양보하지 않았을 테다. 딸아이도 미스 피오나의 팬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누구와 대화하든 한결같은 사람이었다. 어른이든 아이든, 네이티브든 아니든, 영국인이든 아시아인이든 그녀 앞에선 누구나 한치도 다르지 않다. 딸은 그런 그녀를 한해 내내 느낄 수 있었다.



긴 크리스마스 연휴가 시작하기 며칠 전인 12월의 어느 날, 아이 반에서 연극 공연이 열렸다. 사실 그 공연은 이미 유치원 내에서 몇 차례 순회공연을 하던 차였다. 반응이 매우 좋아 반 아이들 부모도 초청하여 교실에서 공연을 하는 날이었다. 크리스마스 전에는 흔히 반에 부모들을 초대하여 크리스마스 파티를 하였다. 올해는 파티 겸 연극 공연이었다.





공연 이틀 전, 같은 반 한국 엄마들에게서 카톡이 왔다. 공연이 12시 정도에 끝나니 학교 앞 Waldtraut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2시 30분에 아이들을 같이 픽업하자는 스케줄이었다. 반가웠다. 오픈 하우스 건 상담이건 나는 늘 혼자였는데, 끝나고 같이 밥을 먹을 이가 있으니 든든하고 좋다. 나도 한국 엄마 친구가 생기는가 보다. 한국애들이 많은 고학년들은 맘 맞는 엄마들끼리 삼삼오오 학교 앞 발트라우트에 모여 브런치를 한다. 나는 오늘이 처음이다. 2년 넘게 나는 나의 한국 친구 생기는 날을 기다렸다. 한국어로 신명 나게 수다를 떨어재끼는 그런 날을 바라고 있었다. 딸애 반에 한국 여자아이가 2명이나 들어오니 이런 날도 온다.


연극이 시작되었다. 15명의 반 아이들 모두 등장하는 이 연극의 시나리오는 동화 신데렐라의 패러디였다. 여자 역은 남자아이들이, 남자의 역은 여자아이들이 맡아서 했다. 나는 한국 엄마들 옆에 자리 잡고 아이를 찾아본다. 아이는 의상이 없다. 딸은 지문을 읽는 내레이터였다. 극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극 밖에서 지문을 읽는 역할이었다. 내레이터니 당연히 무대 위에 오르지 않고 무대 감독인 미스 피오나 옆이니 무대 밖에 앉아있다.


딸은 교내에서 하던 이전 공연들을 준비하면서 잠을 잘 이루지 못하곤 했다. 딸의 역할을 전혀 몰랐던 나는 작은 일에 딸이 긴장을 한다고 여겼다. 반 아이들과 함께 무대에 올라가 대사 한마디 하는 일에 잠을 못 자나 싶어 아이를 쫄보라 생각했다. 아이가 떨었던 날들은 당연한 것들이었다. 시나리오 지문들을 낭랑하게 읽어 내려가는 딸아이의 음성은 네이티브와 다르지 않았다. 아이의 표정에는 긴장함이 역력했지만 끝까지 매끄럽게 읽어 내려갔다.

미스 피오나의 아바타가 되어 극을 이끌어가는 역할을 한국인인 내 딸에게 맡기다니 나와 아이의 행운에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다. 긴 내레이션을 하는 동안 나는 아이와 함께 내내 긴장하고 있어 극이 끝나자 몸이 슬슬 떨렸다. 감사함과 대견함으로 마음이 꽉 차 들어와 점심은 물론 저녁까지 걸러도 될 듯했다.


이 이야기는 해피엔딩은 아니다. 엄마들과 레스토랑에 앉은 나는 서늘한 분위기에서 밥을 먹어야 했다. 두 한국 아이의 엄마들은 자리에 앉자마자 오늘 왜 왔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무대에 올라 한마디를 하는 아이를 보려고 1시간을 소요할 필요가 있냐고 했다.

" 그래도 호박씨는 좋으시겠어요. 대사가 엄청 많았잖아요."

자, 이런 상황에서는 어떤 대답이 정답일까? 사실 난 잘 알지 못한다. 어떻게든 그들의 기분을 맞춰 줘 보자. 그런들 그들에게서 나는 공감과 연대는 얻을 수 없다. 이미 그들의 말속에 우리들의 인연에 대한 답이 있다. 피오나 선생님의 연극 속 그 의미를 모르는 이들과의 인연 맺기란 지금 이 순간엔 불가능함을 나는 알고 있다.

성별을 바꾸고, 국적을 초월하여 반 아이 모두를 주인공으로 만들어준 연극이었다. 딸아이를 보며 계속 긴장한 탓에 다른 아이들의 대사량을 면밀히 집계한 것은 아니지만, 내레이터를 제외한 나머지 아이들의 비중은 같았다. 다들 한껏 분장을 하였으며, 동등한 비율로 등장하여 대사를 하였다. 대사 자체가 많지 않은 연극이었던 바라 딸아이의 내레이션이 더 길었다.


하는 수 없다. 그들과의 우정은 버리자. 그들도 나름 괜찮은 호박씨와의 인연은 못 건졌다. 이것만이 아니다. 그들은 잃은 것은 두 가지다. 미스 피오나라는 보석 같은 사람을 알아보지 못했으며 긴 시간 준비한 본인들 딸의 연극은 의미 없이 지나가버렸다.

하는 수 없다. 그들의 아이들이 내 딸을 따돌려도 말이다. 학교를 내가 다니다시피 했으니 나는 그 두 아이들이 늘 한 몸 같이 붙어 다니며 한국말하는 모습과 계속 마주쳤다. 두 아이가 잘난 척하지 말라며 밀어냈다는 아이의 말을 종종 듣는다. 도려내듯 마음은 아팠다. 아마 다음 학년이 되면 저 두 아이가 다른 반이 될 테고 저 둘은 만나기만 하면 싸울 수도 있다고 아이에게 큰소리를 쳤다. 두 아이의 단짝은 또 다른 아이로 대체될 것이니 두고 보라고 아이에게 일러주었다. 아이는 말한다.

" 엄마, 요새도 둘이 맨날 싸워. 둘이 싸우면 나한테 한 명이 와서 좋아."

씁쓸하지만 그 또한 지나간다.


" 딸, 너 1학년 때 힘들었어? "

이제 5학년이 되었고, 키가 나보다 더 크며, 이번 주에는 첫 생리도 한 딸은 말한다. 그 또한 다 지나간 일이라고 나이 든 여자처럼 말한다.

" 딸아, 여자애들은 원래 그래. 쉽지 않아. 엄마도 맨날 기분이 오르락내리락해서 너한테 쉽지 않잖아. 큭큭."

지나간 일이라고 하지만 딸은 여자 셋이라는 숫자를 싫어한다. 그때에도 실패했으니 지금도 실패할 것이다. 그러니 지레 내려놓아버린다. 다시 실패를 맛보고 싶진 않다. 안다. 나는 아이의 마음을 읽는다.


우리에겐 완전한 실패는 없다. 호박씨는 마흔이 되어서야 깨닫는 바인데, 딸아이가 지금 이것을 깨닫기에는 무리일 게다. 그럼에도 나는 최선을 다해 아이에게 전달한다. 마흔이 넘은 여자인 듯 딸을 대해 본다. 마음을 졸이며 외롭게 지내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서 거듭 말해본다. 삶에 완전한 실패는 없다.

아이의 1학년에서 나는 미스 피오나를 만났고, 아이의 연극을 보았다. 아이는 1년 내내 혼자였지만, 외로움 속에서 성장해나갔다. 그러니 실패라 이름 지을 수 없는 시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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