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독일의 바람직한 여경

- 맥도널드는 괜히 갔어

by 호박씨

독일의 11월의 밤은 길고도 길다. 5시가 되면 한밤중이라 해도 부족함이 없을 만큼 깜깜하다. 안개가 짙게 낀 날은 새벽 5시부터 하루 종일 한국의 저녁 5시 날씨이다가, 실제 저녁 5시가 되면 한국 시간으로 9시 정도의 어둠이 깔린다. 나의 독일 도착이 겨울의 한가운데인 1월이었으니 나에게 독일의 가을 날씨는 낯설기 그지없었다.

옆 동네 Bad Homburg에 위치한 스포츠 클럽 Homburger Turngemeinde 1846e.V은 말이 옆동네지 사실 B455번 국도를 시속 60km 달리면 7분 정도 걸리는 거리다. 나의 동네는 Oberursel의 끝자락이라 옆동네인 Bad Homburg, Krongerg, Konigstein 등과의 경계선과 맞닿아 있다. 오히려 동일 행정구역인 Oberursel오버오젤의 끝까지 운전해서 가려면 20분도 걸렸다. 헤센 Hessen 주 내에서 오버오젤은 가장 넓은 시이기도 하다.


운동을 좋아하지 않는 아들의 절친이 테니스 영재였다. 친구와 같이 시작하면 어떤 운동이든 들이밀 수 있을까 싶어 테니스를 권했다. 절친이 마침 밧홈북에 살았고 절친의 엄마는 8살밖에 안된 아들이 테니스에 열정이 활활 타니 기특하여 부랴부랴 스포츠 클럽을 알아보고 있었다. 몸싸움을 해야 하는 축구나 농구는 독일 남자아이들 덩치에 치이기도 했거니와 아들 성향상 공을 뺏기는커녕 누가 달라고 하면 공을 냉큼 내주는 아들이었다. 마침 밧홈북 스포츠 클럽에 같이 등록해보자고 하니, 테니스라면 시작해 볼만 하겠다 싶었다.


독일은 1년에 두 번, 8월과 3월에 등록을 하는 긴 호흡의 스포츠 클럽이 대부분이다. 특히 Turgemeinde, 공공서비스의 일종인 시민 체육센터의 경우 저렴한 비용으로 레슨을 제공하는 대신에, 1년 단위의 멤버십과 등록 기간이 1년에 2번뿐인 성격을 갖고 있다. 공공 스포츠 센터를 안정적으로 운영하기에는 이런 시스템이 적절하다고 칭찬하고 있었다. 긴 독일의 겨울밤에 대한 인지가 없었기 때문이었나 보다.

운전 미숙에 난시까지 있어 겨울에 운전을 하려면 차선도 안 보이고 차간 거리도 감이 안 온다. 게다가 독일은 전기 절약을 위해 국도와 고속도로에 야간 조명이 없다. 차선이 야광인 정도가 운전자를 위한 배려인 듯하다. 실력이 안되면 일찍 일찍 집에 들어가라는 듯해 보인다. 운전 미숙자에게 친절함은 없는 독일 야간 운전이다.


아들의 테니스는 6시이다. 내년 3월까지 레슨시간은 6시로 고정이다. 변경은 불가하다. 등록을 하던 8월에야 밤 10시도 대낮같이 훤하니 국도로 10분 남짓을 씽씽 차를 몰아 아들을 내려다 주고 딸과 맥도널드나 주변 Rewe 슈퍼에 가서 장을 보며 시간을 때웠다. 7시 5분 전쯤 아들을 픽업하러 출발했다. 딸과 장을 보고 맥도널드에 가서 음료 한 개를 사주며 들고 간 영어 동화책 2권을 읽고 오면 가재 잡고 도랑 치는 격이었다.

그러다 11월이 되자 아들을 데리고 가는 길은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그래도 앞으로 4개월은 더 레슨을 받으러 가야 하니 이 또한 적응해야 한다. 아들을 테니스 클럽에 내려주고 여느 날과 다름없이 딸과 맥도널드로 향했다. 독일 내 맥도널드는 햄버거 맛도, 치킨 맛도 한국 대비 별로이다. 주변 독일 음식점과 비교해 음식이 질이 썩 좋지는 않다 보니 늘 사람이 없다.

그럼에도 전 세계가 다 비슷한 맥도널드 메뉴이기에 나는 알 수 없는 안도감을 느꼈다. 무인 계산대가 있어 독일어를 하지 않아도 되고 음료 주문 없이 딸아이용 맥너겟과 머핀 한 개 정도만 해도 눈치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독일에서는 보기 드문 무료 Wifi 있으니 맥도널드가 마냥 좋다.


6시 45분이다. 맥도널드에서 테니스 클럽까지는 5분 거리니 슬슬 딸아이를 데리고 출발해본다. 그런데 전방에 바리케이드가 덩그러니 서있다. 건너편 차선에는 경찰 Polizie차가 서있다. 경찰차 뒤로는 어두컴컴한 들판 사이로 아들의 스포츠 센터 건물이 보인다. 잠깐만 역주행하면 되겠다 싶어서 바리케이드를 피해 운전해 나갔다.

" 애앵~~"

경찰차에서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울린다. 차를 세웠다. 그래야겠다 싶었다. 양 차선과 차선 주변에는 차는커녕 개미새끼 한 마리도 없다. 그때였다. 경찰차에서 내린 그녀.

혹시 클라우디아 쉬퍼 아시는지? 클라우디아 쉬퍼를 안다면 MZ은 아니시겠다. 그럼 김애란이라는 이름으로 근래에 한국에서 활동하는 독일 모델 클로에는 알리라 믿는다. 경찰복을 입은 180cm의 클로에가 어둠을 뚫고 경찰차에서 걸어 나온다. 독일 경찰은 인물 보고 뽑는다는 이야기를 엊그제도 윗집 언니와 쑥덕거렸었는데, 독일은 남경도 여경도 인물 보고 뽑나 보다.

그런데 여경님, 포스는 모델 포스인데 표정은 몹시 안 좋다.


" 정신이 있는 겁니까? 역주행하고 계시잖아요! 바리케이드 안보입니까? "

영어도 잘하는 독일 여경이다. 참으로 훈훈하다. 씩씩 거리며 외치는 그녀의 영어는 한국어로 바로 호환되어 내 귀에 쏙쏙 들어온다. 발음도 참 좋은 그녀다.

테니스 클럽과 맥도널드 사이의 거리는 2km이다. 구글 맵상 차로는 4분, 걸음으로 27분이 걸리는 거리다. 2km의 중간 어디쯤에서 화물차와 자가용이 추돌하여 사고가 났다고 한다. 그녀의 말은 한마디로 저리로 못 건너가였다. 사고의 내용은 그다음 주 월요일 Oberursel Woche라는 동네 신문에 대문짝만 하게 1면 사진으로 현장을 상세하게 알 수 있게 되었다. 당시 그녀는 어떤 사고가 낫는지 길게 설명하지 않았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인 줄 알지만, 말하기도 창피하지만, 나는 여경에게 통사정을 했다. 우리 아들이 저기 보이는 저 건물에서 테니스가 끝났고 아이는 이제 겨우 8살이라고 말했다. 핸드폰이 없어서 연락도 안되며 아이의 독일어도 서툴다고도 했다. 아름다운 그녀는 말한다. 절대 바리케이드 너머로는 건너가지 못한다고 말한다.

" 돌아가세요."

어디로? 어디로 돌아간단 말인가.....


역주행으로 체포되기 전에 일단 차부터 돌리자.

구글맵을 켰다. Tomtom 내비게이션으로는 돌아가는 길을 찾기 쉽지 않다. 손을 덜덜 떨며 구글맵을 들여다보니 국도 밖으로 나가 밧홈북 시내로 들어가는 길이 눈에 보인다. 내비게이션의 목적지를 시내로 들어가는 초입의 대형 가구점 Möbelland Hochtaunus로 조정했다. 가구점은 스포츠 클럽 맞은편 11시 방향에 위치한다. 가구점 주변까지만이라도 가서 넓은 가구점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아이에게 뛰어가야겠다 싶었다. 어디까지 진입이 통제되어있는지 확신이 서진 않았다. 하지만, 일단 부지런히 가면 15분 안에 아이에게 도착할 수 있겠다 싶었다. 캄캄한 국도로 나가 A661 고속도로로 진입하고 다시 시내로 향하는 Zepplinstrasse로 가면 아들에게 닿을 수 있다. 처음 가보는 경로였지만 답은 이것뿐이다 싶었다. 차를 맥도널드에 세워두고 걸어가 볼까 생각했지만, 여경의 등장에 새파랗게 질린 딸아이를 데리고 조명 없는 들판길을 30분 걸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운전을 하면서 안 되는 독일어라도 해서 스포츠센터에 전화라도 해야 하나 싶었다. 하지만, 야간에 초행길이라 운전하면서 전화를 하는 것 자체가 나에겐 무리였다. 저렴한 공공 스포츠 센터이다 보니 오피스는 전화를 거의 받지 않았고, 오피스의 직원들도 영어를 거의 못했었다. 엄마가 좀 늦게 픽업 간다고 내 아들에게 전해주겠니 라고 말해본들 그들이 이해할까 싶다. 8월에 등록할 때에도 번역기를 사용해서 겨우 의사소통하여 등록했었던 경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해한다고 해도 그들이 아이를 찾아서 그런 이야기를 해줄까 하는 의심도 있었다. 또한 아들이 직원의 독일어를 알아들을지도 의문이었다. 과감히 포기하고 운전에 집중한다.

아들아, 기다려! 엄마와 동생이 데리러 간다.


7시 30분에 나는 스포츠 센터에 도착했다. 운전하는 내내 무섭다며 훌쩍거릴 준비를 하는 딸아이에게 부탁을 했다.

" 엄마도 많이 힘드니까 울지 말아 줄래? 엄마에게 힘이 되어줘. 엄마 길 잘 찾아가고 있는 중이야."

경로는 처음이었지만 A661은 처음은 아니다. 고속도로에 진입하여 밧홈북에 가까워지니 마음이 진정되어 길이 보인다. 이전에 밧홈북시내에 가면서 몇 번 지나가 봤던 길이다. 주차를 하고 딸아이 손을 잡고 테니스 레슨 건물로 뛰어들어갔다. 아들은 다른 아이들 레슨 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아들의 뒷모습을 보니 갑자기 울컥했다. 꽤나 진정이 되어있었는데 안도감 사이에 삐져나오는 울컥함이 당황스럽다.

" 많이 기다렸어? "

" 아니!"

아들은 아무렇지도 않다. 딸과 나는 말짱한 아들에게 우리가 어떻게 여기까지 도착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 흥미진진하게 이야기해주었다. 우리 셋은 재잘거리며 검고도 검은 독일의 밤을 가로질러 집으로 돌아왔다. 그 뒤로는 아이의 테니스 레슨 시간에 맥도널드에 가지 않았다. 이케아 미니어처 같은 구성의 뫼벨란트 가구점으로 딸아이와 쇼핑을 갔다. 사탕 한 봉지에 10유로, 만원이나 하는 것을 딸아이가 가끔 집어 들어 속은 좀 쓰렸지만, 이케아처럼 문구나 팬시, 주방용품도 다양하고 카페도 있어서 1시간을 보내기엔 모자람이 없었다. 그날 밤 나에게 등대가 되어 주었던 의리를 지켜야 하기에 가성은 좀 떨어져도 맥도널드에 가야 할 만큼은 아니었다. 들판 건너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특히 어두운 겨울에는 말이다.


클라우디아 쉬퍼는 독일이 나은 세계적인 슈퍼모델로 샤넬의 수석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의 뮤즈로 유명했다. 게스 모델로 90년대를 사로잡은 그녀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는 중이다. 그날 밤의 해프닝은 2021년 11월 오늘도 살아 있는 이야기가 되었다. 재독한인 역사상 바리케이드 뚫고 역주행하다가 클라우디아 쉬퍼 닮은 여경을 만나 호통을 들은 한인은 호박씨가 유일무이할 것이다. 그러니 독일에서의 어떤 기억도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개인싸 냥인싸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