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의 고양이 백설이는 나이를 알 수 없다. 이 집 저 집 옮겨 입양되다 결국에는 동생에게 오기 전 마지막 주인이 백설이를 동물 병원에 잠깐 맡기고 가더니 찾으러 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동물 병원에 버려진 백설이는 동생의 전남친을 통해서 동생에게 도착한다. Snow white 수준의 미모를 자랑하는 이 분은 원래도 도도하게 생겼지만, 사실은 마음의 상처가 있는지라 표정이 늘 공허하다. 페르시아 고양이는 귀머거리 비율이 선천적으로 높다는데 백설이도 예외 없이 귀머거리다. 귀가 안 들리니 매사에 조심스러우며, 까칠함을 넘어 폐쇄적이다 싶은 성격이다.
그런 백설이를 지치지 않고 쫒아다닌 이가 있었으니 딸이다. 겨울이면 어김없이 침대 밑에 들어가 있는데 방문한 우리 가족을 피해서 침대 밑에 들어가 있는 백설이를 발견하는 딸은 머리를 침대 밑으로 디민다. 만 3세 정도였으니 턱이 높은 침대 밑도 들어갈 수 있다. 백설이 몹시 당황했을 것 같다. 작은 인간이 본인의 피난처까지 쳐들어왔으니 말이다.
" 아~~~ 퍼!"
딸의 이마에 고양이 손톱자국이 선명했다. 딸을 나무랐다. 피해서 들어간 곳까지 따라 들어가면 당연히 할퀸 다고 말이다. 그래도 딸을 안고 백설이에게 눈으로 욕해줬다. '할퀴는 척만 하지, 이 녀석아'라고 생각하며 사파이어처럼 반짝거리는 고양이 눈을 빤히 쳐다보니 슬금슬금 눈을 피한다. 속이 훤한 고양이다. 사연을 아니 늘 그저 안쓰러운 녀석이다.
본 지 10년이 돼도 동생 방에만 들어. 가면 부리나케 피하던 녀석의 변화는 작년부터였다. 5년 만에 봤으니 놀랄 만도 한데 큰 반응은 없었다. 그런데 내가 캣타워에 접근해도 피하질 않는다. 슬쩍 용기를 내본다. 이런 나의 자신감은 괜한 데서 오는 게 아니다. 내가 알고 보면 동물계에선 좀 인기가 있기 때문이다. 손등을 내밀어 슬쩍 입에다 대어 본다. 냄새만 맡는다. 이번에 손바닥. 할짝할짝 핥아준다. 성공이다. 하얀 솜털로 덮인 미간 사이에서 이마로 쓱쓱 쓰다듬어 주기까지 했다. 때마침 아이들은 없던 찰나여서 조용히 우리는 대화할 수 있었다. 딸아이에게 염장을 좀 질렀다. 본인은 한 번도 털끝도 못 건드려본 까칠한 그녀를 쓰다듬어 보다니...
" 엄마가 동물들한테 좀 인기가 좋아."
매일 가는 산책길에도 어쩌다 눈이 마주친 견공들에게 추파를 지긋이 날리면 꼬리를 흔들면서 다가온다. 극비인데 비법은 마스크를 썼음에도 불구하고 빙그레 웃어 시선을 부드럽게 해서 개의 이마쯤을 바라봐 주는 것이다. 그럼 백이면 백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면서 내 쪽으로 다가온다. 가끔 주인 분들이 내 발에 코를 대는 개들 때문에 미안해 하지만 사실로는 내가 먼저 추파를 던져 준 셈이니 미안해하실 일은 아니다. 동물 인싸인 이유는 내가 그들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독일에서부터 개를 키우자고 주장한 딸아이였다. 귀여운 것은 뭐든 좋아하는 딸아이는 산 것을 좋아한다기 보단 동물의 외모를 보고 호불호를 가리는 것 같아 보였다. 적어도 엄마의 눈엔 말이다. 동물 애호가가 아니라 귀여움 애호가로 보였다. 단호박인 호박씨, 겨우 대여섯 살 밖에 안된 아이를 두고 그런 귀여움 애호가의 마음은 진정 생명을 책임지기엔 무리가 있다고 여겼다. 딸은 동물 키울 깜냥이 안된다 생각했다. 어린아이에게 가혹한 잣대가 아니겠냐 하겠지만, 한 생명을 그리고 한 인연을 인생의 울타리 안으로 들이는 일에는 그만한 그릇이 필요하다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고지 곧대로 이런 나의 생각을 설명하기란 여섯 살에겐 쉬운 일은 아니다. 다행히 우린 독일에 살았고 독일은 그야말로 동물 보호법이 지엄하다.
2020년 8월 독일의 식품농업부 장관은 1일 2회, 1시간 이상의 반려견 산책 법을 입법화한다. 2002년 동물보호법을 통과시켜 동물에 대한 윤리를 법으로 정한다. 독일에서 반려견을 입양하려면 펫 샵이 아닌 유기동물 보호소 Tierheim를 통해 입양해야 한다. 입양 시 월 4회 이상 3시간씩 Tierheim을 방문하여 본인이 입양하게 될 동물을 책임질 수 있는 소양을 기른 후에야 입양이 허가된다. 돈 주고도 사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며 나의 시간을 투입하여 반려인으로서의 자격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프다. 강아지 한 마리를 누가 준다면 모를까 입양 절차 자체가 까다롭다. 일단 독일법이 엄해서 우리에겐 개를 허가해 주지 않을 거다라고 일단 딸에게 일러둔다.
출처 구글맵 Tierheim Hochtaunus
큰 난관은 유기동물 보호소의 위치였다. 주말이면 항상 산길을 따라 아이들은 자전거를 타고, 나는 걸어서 ( 호박씨는 바퀴 달린 것을 다루는 기능이 탑재되어있지 않다.) 가는 타우누스 지역의 초입에 이 유기 동물 보호소가 있다. 보호소는 집에서 자전거로 5분 거리인 셈이다. 다행히도 표지판에 보면 매주 목, 금 은 오후 2시에서 4시, 토요일과 일요일은 12시에서 2시에만 한시적으로 오픈한다. 이 시간을 기억해 뒀다가 이 시간만 피해서 방문하면 된다.
" 아이고, 딸아. 어쩌니 다음에 방문하자."
그땐 어렸던 지라, 그렇고 지나가면 주중에는 또 홀랑 까먹는 아이여서 다행히 이런 식으로 보호소 방문 및 독일에서의 반려견 입양은 일단락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는 한국 가는 비행기에 강아지를 태우고 가는 게 불가하다고 새빨간 거짓말을 해서 아직 입양되지도 않은 상상 속의 그 반려견을 독일에 놓고 가야 한다며 아이의 눈물을 쏙 빼서 입양 의지를 철회시켰다.
그렇고 나니 좀 미안하다. 게다가 동물에게 애정이 깊은 나에겐 독일은 정말 유혹의 대상들이 너무나 많다. 집집이 개나 고양이, 토끼 없는 집이 드물었다. 아이가 Primary학년에 되자 Ms. Fiona가 Homeroom 담임선생님이 되었다. Ms. Fiona로 말할 것 같으면 학교에서 1시간 정도 걸리는 외곽에 농장에 가까운 본인의 집을 소유하신 분이었다. 피오나 선생님의 댁에는 각종 농장 동물들, 예를 들면 개, 고양이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당나귀, 토끼, 기니피그들이 있었다. 프라이머리 학생들이 선생님 댁으로 학교버스를 타고 필드 트립, 체험학습도 1년에 한 번 정도 간다고 하면 어느 정도인지 예상 가능할 것 같다.
피오나 선생님은 아기 기니피그 형제가 태어나자 그들을 홈룸으로 데려와 그 해의 그 반 아이들이 한 해 동안 그 형제들을 관리할 수 있게 그들을 홈룸에서 키웠다. 주말이나 방학이 되면 교실 앞 Notice에 신청자를 받아서 이 기니피그 형제들의 외박을 접수받는다. 딸아이가 이 반이 됐으니 신청 안 하고는 못 배긴다.
그렇지 않아도 개는 비행기를 못 탄다고 거짓말로 아이를 울려뒀으니 이거라도 해야겠다 싶었다.
이 토끼와 쥐의 중간쯤 되는 조그만 두 생명체쯤이야 했는데 예상보단 파란만장했다. 삶이 좀 이래야 맛이 있나 보다. 예상과는 다른 전개, 나름의 스펙터클쯤은 있어야 브런치 감이 될 수 있으니 말이다.